한국사회는 10월 유신의 후폭풍으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반유신과 반독재 목소리가 커지면 커질수록 군사독재 정권의 탄압은 심해졌다. 인권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불온시되고 정의를 외치다가는 목숨마저 위협받는 상황이었다.
급기야 유신정권은 긴급조치 위반자 180명을 구속하면서 원주교구장이시던 고 지학순 주교님까지 사건에 연루시켜버렸다. 불순세력의 조종을 받는 불법단체에 자금을 댔다는 이유에서였다. 마침 해외여행 중이셨던 지주교님은 귀국하는 길에 영문도 모른 체 공항에서 연행돼 구속되고 말았다.
용공분자라는 올가미를 씌워 민의를 꺾으려는 정권의 음모 앞에 가만히 있을 수 있는 이는 없었을 것이다. 전국이 들끓기 시작했고 수백명의 신부님들이 서울로 올라와 명동성당에서 구국기도회를 열었다. 우연히 들렀던 명동은 나를 역사의 현장으로 불러내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명동성당 성모동굴 앞에서 미사를 드리는 신부님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내 가슴으로는 한순간 먹먹해지는 느낌과 함께 감동이 물밀듯 밀려들었다. 그들의 모습이 마치 천사처럼 보였다. 인간을 속박하는 이들조차 사랑으로 껴안고자 하는 사제들의 모습을 보며 나는 많은 생각을 했다. 지금도 그 때를 돌이켜볼 때면 마치 영사기를 돌리듯 생생하게 떠오르는 장면들과 함께 오묘한 섭리로 당신께로 불러주신 주님께 고개가 숙여진다.
신자들이 불의에 항거하는 이유를 전혀 모르다 갑자기 몰려온 깨달음에 정신이 번쩍 든 나는 내 느낌을 평생지기인 유현석 변호사에게 말하고 신자가 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그랬더니 유변호사는 『그럴 줄 알았다』며 원한다면 단기간에 신자가 되도록 도와주겠다는 뜻까지 내비쳤다. 그러나 나는 다른 이들과 똑같은 길을 거쳐 신자가 되고 싶었다. 그 날 이후 유변호사가 구해다 준 각종 교리서와 신앙서적 등을 탐독하며 교회의 향기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공부를 해 74년 성탄을 앞둔 12월 22일 서울 세종로성당에서 세례를 받고 주님의 아들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느지막이 내 인생의 새로운 십자가를 발견하고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지학순 주교님의 구속을 계기로 74년 9월 26일 창립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과 이에 앞서 70년 8월에 설립돼 활동을 펼쳐오고 있던 정의평화위원회는 유신정권의 인권 탄압에 맞서 정의의 칼을 앞세우고 싸우는 교회의 선봉대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일찌감치 정평위에서 활동하고 있던 유변호사의 권유로 나는 자연스럽게 정평위에 몸을 담게 됐다. 이 때를 전후해 나는 본격적으로 인권변호사의 길로 뛰어들게 된다. 오늘날 흔히들 말하는 인권변호사라는 말은 이렇듯 군사독재정권이 낳은 역사적 산물인 셈이다. 지나온 길을 곰곰이 되돌아보면 감히 인간이 생각지 못한 방식으로 당신의 사람을 인도해주시는 하느님의 숨결을 발견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당시엔 변호사로서 인권 사건을 수임한다는 것 자체가 상당한 위험부담을 각오한 일이었다.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공갈 협박은 보통이요 도청과 미행, 더 나아가 연행에 구속까지 당할 수 있었다. 나는 이 시기 황인철, 홍성우, 조준희 변호사 등과 지속적이고도 집단적으로 변론을 수행함으로써 인권변론 활동에 있어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나갔다. 시국사건이 있는 곳엔 반드시 모습을 드러낸 우리를 두고 항간에서는 「인권변호사 4인방」이니 하는 별칭을 붙여주었지만 따지고 보면 이 또한 독재정권이 낳은 작품인 셈이다.
민청학련 사건을 계기로 오늘의 민가협의 모태가 되는 구속자가족협의회가 만들어졌다. 명동 전진상교육관은 이들의 아픔을 어루만져주고 위로하는 피난처가 되어주었다. 때를 같이해 내 사무실도 늘 구속자 가족들로 붐벼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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