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살면서 요구되는 여러 자질들은, 궁극적으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이를 통해 세상과 나의 운명을 의식적으로 합의해 나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지, 남을 무너뜨리기 위해, 혹은 내 존재의 우월성을 누구와의 비교를 통해 이기적으로 확인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좀더 자발적으로 수확하는 것, 그 안정되고 평화로운 마음만이 전도서가 제시하는 「헛되지 않은 삶」의 실체라고 하겠다.
6장
6장은 코헬렛이 지금까지 피력한 내용을 다시 한번 수렴하고 있다. 아무리 많은 자손을 낳고, 막대한 재산을 모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누리지 못하고 죽는다면 그 재물이 무슨 소용이 있는지(2~7절)가 제시되고 있고, 8절은 2~7절의 내용과 상반되는 내용, 즉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안다고 해도 가난하다면』 그의 지식이 무슨 소용 있는지를 묻고 있기 때문이다.
6장 후반부는 지금까지 서술된 모든 내용의 신학적 근거가 제시된다. 세상은 하느님에 의해 결정되고 진행되는데, 유한한 인간이 하느님께 『왜 이러느냐고 따질 수 없다』. 이것이 삶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성실해야할 근원적 사유이다(10절). 즉, 삶을 제대로 잘 살기 위해 가장 요구되는 태도는 「인간과 그 현실에 대한 냉정한 인식」이라 할 수 있다(11~12절). 인간은 자신을 창조하고 생명을 불어넣어 주신 하느님을 거부하고 이에 항의할만한 능력을 「현실적으로」 갖추지 못했으며, 결국 창조주의 뜻에 맞추어 살아갈 때 가장 안전하고 의미있는 삶을 향유할 수 있는 것이다.
7장
7장부터는 지금까지의 사색적 논조, 고백적 문체와는 다른 서술 형태가 등장한다. 일종의 잠언집을 연상시키는 스타일이다. 내용은 잔칫집에 가는 것 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더 현명한 일이라는 것으로 시작된다(1~4절).
잔칫집이야 사는게 언제나 축제요 즐거움이라는 느낌을 갖게 하지만, 초상집은 사람이 언젠가는 반드시 죽는다는 현실을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 5~10절 사이에는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이 대조되고 있다. 지혜로운 사람에 의해 책망을 듣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으로부터 칭찬을 듣는 것보다 훨씬 유익하다. 그러나 아무리 지혜롭다해도 평탄한 삶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은 좋은 일도 있게 하시고 나쁜 일도 있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도서는 삶을 살아가는 가장 현명한 방법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일이 잘되거든 그 행복을 마음껏 누리고, 일이 틀려가거든 이 모든 것이 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인 줄 알아라』(13~14절).
15~22절은 「중용」에 대한 내용으로 되어있는데, 언뜻 읽어보면 지금까지의 논지를 부정하는 내용인 듯이 보여진다. 살다보니 착한 사람은 착하게 살다가 망하고 나쁜 사람은 곱게만 늙어가니, 너무 의롭게 살려고도, 악하게만 살려고도 하지 말라는 충고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여기에서 사용된 「너무」, 「지나치게」라는 히브리어 부사이다. 이들은 질보다 양을 나타낼 때 사용되는 것으로, 「드러나는 부분에 치중한 의로움」을 의미한다. 즉, 『너무 의로울 필요가 없다』는 16절의 표현은 너무 외적인(가식적) 의로움에 얽매일 필요가 없음을 의미하는데, 한 인간의 의로움은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직접 판단하시기 때문이다.
23~29절은 코헬렛이 풀 수 없던 신비 두 가지가 제시된다. 「지혜」와 「여자」이다. 그는 지혜를 찾아다녔지만 너무도 멀리 있음을 깨달았고(23~24절), 여인은 죽음보다 더 위험스러움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한다(26~27절). 사족처럼 덧붙여진 한마디. 하느님은 세상의 모든 문제들을 단순한 원리로 있게 하셨는데, 이를 복잡하게 만드는 건 인간 스스로라는 것(29절)!
세상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다
장마와 태풍이 올 때마다 많은 준비로 방어태세를 갖추지만, 번번이 느끼게 되는 것은 인간의 유비무환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 따라서 인간은 결코 세상의 주인이 아니라는 깨달음이다. 나 자신의 생명조차 마음대로 조절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최악을 대비하는 가장 똑똑한 선택은 아마도 「세상과 삶을 하느님안에서 다시 읽어내고 이를 긍정하는 태도」가 아닐까한다. 그럴 때 비로소 인간은 스스로에게 겸손해질 수 있고, 자신을 돌봐줄 여유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삶과 세상에 대한 완강한 고집과 오만함이야말로 내 삶을 내 것이 아니게하는 치명적 장애임을 먼저 깨닫는 자만이, 삶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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