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인혁당재건위 사건이 조작됐다는 내용의 글 때문에 필화를 겪은 김지하 시인을 비롯해 인혁당사건을 폭로해 추방당한 시노트 신부 등 민주화의 도정에서 신자들의 예언자적 역할은 돋보였다.
가난한 이들에게 인간다운 삶을 전하던 크리스천아카데미에 불법용공서클이 침투했다는 크리스천아카데미 사건, 1979년 4월에 발표된 통혁당재건기도 사건 등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수많은 사건을 조작하며 억울한 이들을 양산해내던 정권의 말로는 어쩌면 허무하다 싶을 정도로 갑작스레 닥쳐왔다. 10월 26일 새벽 우리가 전력을 다해 맞서 왔던 독재자 박정희 대통령이 죽었다는 소식은 한동안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12·12와 5·17 쿠데타로 집권한 신군부의 통치는 유신체제를 계승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80년대의 민주화운동은 한마디로 대량구속과 고문의 소용돌이 속을 헤쳐 나가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광주민중학살의 책임을 떠넘기려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막을 연 80년대는 사건이 없는 날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나는 신군부의 계엄철폐를 요구하는 134인 지식인선언에 참여했다가 7월 14일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었다. 황인철 홍성우 변호사 등 인권 4인방 모두가 끌려와 있었다. 그 곳에서 군인들이 광주에서 저지른 참혹한 학살의 진실을 보다 확실히 알고 진저리를 쳤다. 평소 변론의 강도가 셌던 나와 홍변호사는 회유와 협박을 받으며 휴업을 강요당했다. 아마 친분이 있던 김대중씨의 변론을 막기 위한 점도 작용한 모양이다. 어쩔 수 없이 변호사 휴업계를 냈지만 사무실에 나가 정평위와 연관된 변론사무를 도맡거나 실무를 챙기는 일을 하며 하던 일을 멈추지 않았다. 5·17 이후 감옥이 넘쳐나고 변호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도 늘었기 때문이다.
1982년은 미국에 대해 막연한 생각만을 품고 있던 이들을 일깨운 사건이 일어난 해였다. 3월 18일 부산 미문화원 건물이 불타 도서관에서 책을 보던 대학생이 숨지고 3명이 부상당하는 이른바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이에 앞서 광주에서도 미 문화원이 가톨릭농민회 회원들에 의해 불타는 사건이 있었지만 정부의 철저한 언론통제 탓에 단순한 전기누전사고로 발표돼 그 진실이 알려지지 않았다. 이처럼 80년대 들어 반미항쟁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유신시절만 해도 영원한 우방으로 여겨오던 미국의 진면목이 5?18 광주민중항쟁 이후 새롭게 드러나며 국민들의 공분을 샀기 때문이다.
미문화원 방화사건은 국민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며 「반미운동」의 물꼬를 틈과 아울러 광주문제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방화사건을 주도한 문부식과 김은숙은 지학순 주교님이 계시던 원주교구로 도피해 최기식 신부에게 도움을 청했다. 최신부는 함세웅 신부에게 그들을 도울 방안을 상의해왔고 함신부는 나와 유현석 변호사, 김정남씨 등을 비상소집해 대책을 논의했다. 사흘간의 회의를 통해 내린 결론은 언제까지나 숨길 수 없으니 자수를 시키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함신부를 통해 안기부에 연락해 문씨 일행을 자수케 했다. 안기부측은 전전긍긍하던 차에 일을 손쉽게 해결할 수 있게 돼 고맙다며 큰 문제없이 해결하겠다는 전두환의 말까지 전해왔다.
우리는 그 무렵 광주항쟁 때 유인물을 뿌린 혐의로 수배를 받다 원주교구에 피신해 있던 김현장씨도 며칠 간격으로 설득해 자수시켰다. 그런데 당국에서는 김씨를 고문해 방화사건의 배후 조종자로 만들었다. 이어 이들에게 자수를 권유했던 최기식 신부마저 범인은닉죄로 구속시켜버리고 말았다. 모든 일의 내막을 알고 있는 우리로서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런 암담함 속에서도 하느님은 역사하고 계셨으니 그 오묘한 섭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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