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가장 누추하고 비굴해지는 때는 「상실」을 눈앞에 두고 있을 때가 아닐까 한다. 지금껏 쌓아온 재산과 명예를 한 순간에 잃을까봐, 그리고 사랑하는 이들을 잃을까봐, 추한 현실을 못견뎌 하면서도 거기에서 선뜻 돌아서지 못한다.
그러나, 그런 상실과 절망의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마지막 힘을 다한 용기와 겸손, 자기 존중의 마음이 아닐는지….
서정주 시인의 「꽃밭의 독백」에는 이런 구절이 등장한다.
『벼락과 해일만이 길일지라도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그 어떤 상실 앞에서도 자신의 긍지를 지키는 것이 곧 삶을 지키는 길임을,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세상과 인생에 대해 가져야할 인간 본연의 자세임을 가르쳐 주는 구절이라 생각되었다.
연말과 신년 벽두를 강타한 동남아 지역의 해일은 사실 「그들만의 재앙」이 아니었다. 숨겨진 지뢰를 피하듯, 수많은 복병을 감수하고 살아가는게 우리의 삶이며 현실이기 때문이다.
결국, 아무 생각 없이 보내는 하루 하루는 하느님이 주신 최고의 기적이며 선물이라는 결론에 다시 이르게 된다.
갑작스레 해일이 덮치듯 모든 것을 「상실한」 여자들이 또 있었으니, 바로 나오미와 룻이다. 도저히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망가진 운명과 비관적 상황에서, 나약한 그녀들이 어떻게 자신과 가족의 운명을 지켜낼 수 있었는지, 그녀들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기로 하자.
구조와 내용
룻기는 다윗의 증조모 룻의 이야기이다. 저자는 그녀가 다윗의 할아버지 오벳을 낳게된 경위를 소개하고 있는데, 각 장(暲)은 장소적 배경과 등장인물에 따라 배열되어 있다. 그 구분을 그대로 따라가며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1장,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
모든 설화나 소설이 그러하듯, 룻기의 첫 부분은 이야기가 시작되는 배경과 상황을 설명한다. 여기에서 특징적으로 부각되어 있는 주제는 「잃음」 혹은 「상실」이다. 「먹을 것이 없어서」 모압으로 이주하고, 거기에서 남편을 「잃고」, 두 아들마저 「잃은」 나오미의 모습이 부각되어 있기 때문이다.
1, 1~7(도입)
이 이야기의 배경은 「판관 시대」로 되어 있다. 구약성서의 많은 책들이 그 서두에 시간적 배경을 명시하고 있는데(아모 1, 1 이사 1, 1 등), 이는 제시된 이야기가 실제로 그때에 저술되었음을 가리킨다기보다는, 소개될 이야기의 실제적, 역사적 「사실성」을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이야기의 시작은 이러하다. 유다 베들레헴에 살고 있던 엘리멜렉은 심한 가뭄 때문에 부인 나오미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으로 이주하지만(1절), 머지않아 죽음을 맞게 된다(3절). 두 아들은 거기서 오르바와 룻이라는 모압 여인들과 결혼하는데(4절), 그들 이름이 상징하는 것처럼(정확하지는 않지만 큰 아들의 이름 말론은 「질병」을, 둘째 아들 킬론은 「황폐한」이라는 뜻을 가진다) 모두 젊은 나이에 죽는다(5절).
고대 근동, 특별히 이스라엘 부족사회에서, 집안의 남자들이 모두 죽었다는 것은, 남아있는 여성이 모든 것을 상실했음을 의미했다(출애 22, 21 신명 24, 19~21 등).
남편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된 여인은 아들의 보호를 받게 되는데, 아들들마저 모두 잃은 나오미는 그 누구의 보호도 받지 못하게 된다.
더욱이 이방국에서 살고 있었기에 국가와 민족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보호에서도 제외되는데, 이런 급작스런 불행에 결국 나오미는 모든 것을 정리하고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고자 한다(6절). 「빵의 집」이라는 의미를 가진 베들레헴에서 그녀는 정말 빵을, 즉 목숨을 얻을 수 있을까?
상실의 극복, 평화
교회가 「세계 평화의 날」로 제정한 1월 1일은 성모님의 축일(천주의 모친 대축일)과 병행되어 있다.「평화의 모후」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세계 평화의 주도적 역할을 하고 계신 성모님의 생애와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룻의 생애는 거창한 슬로건이나 정치적 담론과는 거리가 멀었다.
진정한 평화는 구호나 공적담론의 성토를 통해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에 대한 존중과 그 삶을 인도하시는 하느님께의 경외를 통해서 실현되는 것임을, 그녀들은 자신들의 소박한 삶을 통해 조용히 증명해 준 것이다.
세기적 재앙이라고 하는 그 해일만 아니었다면 여전히 정감 있고 수줍은 눈빛을 가지고 있었을, 동남아시아 작은 섬의 그녀들의 눈물에서, 무서운 상실의 아픔을 읽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그들이 삶을 포기하지 말기를, 그리고 용기를 내어 자신의 운명과 화해하기를, 멀리서나마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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