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건설 허가 받고
스님 법사 개종시켜
하비에르 신부는 1551년 4월 말경 야마구치(山口)의 영주 오오우치 요시타카(大內 義隆)를 다시 알현한 자리에서 기리시탄 포교허가를 받고, 주거지로 대도사(大道寺)를 기증 받았다. 곧 바로 하비에르 신부는 네거리 설교와 학자, 학승들과의 토론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유일신(唯一神) 「대일」(大日)신앙을 포교하는 도중에, 「대일」을 본존(本尊)으로 하는 불교에 대하여 알지 못한 탓으로 교회 용어 번역에 큰 과오가 있음을 알았다. 이를 계기로 하비에르 신부는 교회 용어의 번역을 재검토할 필요성을 느꼈으며 박해에 대비하여 교리서와 신심서 출판을 시도하게 되었다.
하비에르 신부는 야마구치에서 아시카가(足利)대학 출신 박학 스님을 개종시켜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이에 불승의 반발이 거세어지기 시작하였다. 또 한사람의 개종은 비파법사 맹인 로렌조 료우세이(了西)였다. 그는 일본인 예수회 수사가 되어 초기 포교에 크나큰 역할을 하였다.
가신의 배반으로 요시타카가 자결하고 그 뒤를 이은 요시나가(義長=大友義鎭의 弟)는 부친의 뜻을 받들어 저 유명한 재허장(裁許狀)을 발급하여 포교의 자유와 대도사(大道寺)에 교회 건설을 허가하였다. 오오우치 요시나가의 재허장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야마구치의 대도사(大道寺)에 선교사의 주거와 포교, 교회 건설을 허가한다. 1552년 8월 28일」.
하비에르 신부의 일본 포교에 가장 호의적이었으며 가장 먼저 포교허가장을 발급한 영주 요시나가(義長)는 1557년 모리 모토나리(毛利 元就)와의 전란 중에 자결함으로써 오오우치 가(家)의 야마구치(山口)시대는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나 그 융성했던 문화는 현재도 일본 문화사에 찬란히 빛나고 있다.
하비에르 신부의 선종
붕고(豊後)의 영주 오오토모 요시시게(大友 義鎭=宗麟)의 초청을 받아 붕고(현 大分)에서 포교를 하고 있던 하비에르 신부는 일본 사정에 맞는 새 선교사 파견을 생각하고 1551년 11월 중순 인도로 떠났다. 중국 포교의 중요성을 느끼고 광동 부근에 있는 상천도(上川島)에서 입국의 기회를 보는 중에 하비에르 신부는 열병에 걸려 동양에 그리스도교 전파를 기도하며 1552년 12월 3일 선종하였다.
일본 체재 2년3개월 동안 하비에르 신부의 포교계획을 크게 두 가지로 본다면, 하나는 국왕의 포교허가를 얻어 일본 전국을 자유롭게 전도할 방침이었고 또 하나는 일본의 종교와 문화의 중심인 불교계와 지식인을 개종시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하비에르 신부의 일본 포교방침을 이어받은 예수회 일본 포교장 토르레스 신부는 보다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하여 끊임없이 천황, 장군, 영주와의 알현을 시도하게 되고 이에 따라 수용과 저항이 나타나고 있다.
사진설명
중국 광동 부근 상천도에 있는 하비에르 신부 선종기념성당.
박양자 수녀 <오륜대 한국순교자기념관 학예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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