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어의 문제
먼저 「신흥영성운동(뉴에이지)」이라는 용어에 대해 설명할 필요를 느낀다. 이미 한국 가톨릭교회 내에서는 「신영성운동」이라는 용어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중이다. 이는 일본의 종교사회학자 시마조노 스스무가 뉴에이지 운동 및 일본과 한국에서 생겨난 그와 유사성을 지니고 있는 영성운동들을 총칭하는 표현으로 도입한 용어이다. 한국에서는 노길명 교수가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간 필자도 글과 강의를 통하여 이 용어를 사용해 왔다. 그런데 「신영성운동」이라는 이 용어를 처음 접하는 교우들과 사제들은 뭔가 혼돈스러워하는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처음에는 대부분 『무슨 좋은 영성프로그램이 나왔는가 보다』하며 기대감이나 호기심을 가졌는데 나중에 대강 실상을 파악하고 보니 「위험한」 사이비 영성이더라는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신영성운동」이라는 용어가 과연 적절한 것이냐 하는 반문을 해 오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이것이 용어문제에 대하여 재고하게 된 연유이다. 그 결과 「신영성」 대신에 「신흥영성」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더 적합하다는 견해를 갖게 되었다.
그 이유는 이렇다. 여러 종교 현상들을 제3자의 입장에서 관찰하는 종교사회학자의 관점에서 봤을 때, 이 용어는 별로 무리가 없을지도 모른다. 기성 종교의 범주 밖에서 새로운 형태로 확산되고 있는 이 시대 영성의 현상을 「신영성운동」이라고 이름붙이는 것은 당연했을 것으로 짐작이 간다.
그러나 기성 종교의 입장에서 봤을 때, 이런 새로운 형태의 영성 현상은 결코 「새로운 영성」 곧 신영성(新靈性)이 아니다. 그러니까 과거에 없었던 「새로운 영성」이 아니라 과거 여러 종교에서 이미 있어왔던 것을 혼합하여 새롭게 「붐」을 타고 있는 영성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신(新) 곧 「새로운」이라는 표현 대신에 신흥(新興) 곧 「새롭게 부흥하는」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더 합당하다고 본다. 그래서 「신흥영성운동」이라고 부를 것을 제안한다. 이는 「신흥종교」와 유사한 것이라는 의미에서도 궤를 맞춰줄 필요가 있다고 본다. 여기에 「(뉴에이지)」를 추가한 것은 뉴에이지가 신흥영성운동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가톨릭교회 내의 다원적 반응
이제 본 주제로 돌아와 보자. 지난 번에 신흥영성운동(뉴에이지)에 대한 가톨릭 신자들의 반응과 폐해에 대하여 언급하던 참이었다. 마저 얘기해 보자.
언급하였듯이 신흥영성운동(뉴에이지)는 다원주의 시대에 흥성하고 있는 가장 대표적인 현상 가운데 하나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대목은 이에 대한 가톨릭 교회 내의 반응도 다원적이라는 사실이다.
우선 신자들의 태도가 다원적이다. 지난 호에서 우호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는 사람들의 예를 들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다수가 중심을 잘 잡고 있다. 그 가운데에는 교회와 신자들의 영적인 안녕을 위하여 노심초사하는 「남은 자」(1열왕 19,18)들이 있다. 그 단적인 실례로써 다음과 같은 이메일을 보내온 자매님의 열심을 소개한다.
『안녕하세요 노베르또신부님. 저는 미국 동부지역에 살고 있는 신자 김율리엣다입니다. 괴상한 「마음수련」이라는 것이 한인 신자들이 밀집하여 살고 있는 이곳 동부까지 왔습니다. 긴장하고 있는 가운데 신부님의 글을 성모기사지에서 발견하고 여러 장 복사하였습니다. 우선 레지오 단원들에게라도 교육을 시킬까 해서요. 괜찮겠지요?
제가 지금 글을 드리는 것은 000이라는 것 때문입니다. 제가 인터넷 상에서 약간 조사한 것에 의하면 아무리 보아도 뉴에이지와 비슷한 부류인데요. 어찌된 일인지 본당사목회 교육부 주관으로 이틀씩 두 번에 걸쳐서 000세미나를 한다고 합니다. 000연구소 수녀님께서 오셔서요. 마음이 답답하여 연락드립니다. 제가 너무 민감한 것인지 아니면 저의 염려가 사실인지요. 만일 사실이라면 문제점을 파악하고 최소한 알고는 있어야 할 것 같아서요. 물론 일개 신자로 본당에서 주관하는 행사를 어찌할 수 있는 힘은 없습니다. 하지만 알고 있으면 주변 분들에게라도 조용히 알려주고 현명한 대처를 하도록 설명은 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도움말씀 부탁드립니다』
인용 글 가운데 000로 처리한 것은 그 프로그램에 대하여 일괄적으로 판단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그 프로그램 및 관련자 전체를 총괄하여 옳으니 그르니를 평가한다는 것은 위험한 접근법이라는 견해를 말해줬다. 사용자의 의도와 영적 노선에 따라 다른 결론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었다. 여하튼 이메일 전문을 인용한 것은 글의 말미에 서려있는 건강한 사도적 열심을 독자들께 전하기 위함이다.
미국으로부터 이 자매님 보다 먼저 국제전화를 통하여 비슷한 염려를 전해온 자매님도 있었다. 지난 3월 말쯤이었을 것이다. 자매님은 자신이 다니는 한인공동체 신자 30여명이 「마음수련」이라는 데에 빠져서 거의 신앙을 잃을 지경이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오면서 안타까움에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러니칼하게도 이에 대한 교회 책임 기관의 태도 역시 다원적이다. 그동안 한국 천주교회 주교회의에서는 「건전한 신앙을 해치는 운동과 흐름」이라는 문헌을 비롯한 여러 자료를 통하여 그 해악을 알려왔다.
필자가 파악하기로는 사목자들 가운데에는 이 문헌을 열심히 교육한 이들도 있고, 자신만 읽고 신자들에게는 교육을 안 한 이들도 있고, 자신도 안 읽고 신자들에게 교육도 안 시킨 이들도 있다.
나아가 주교회의에서 「신흥영성운동(뉴에이지)」이라고 규정한 바로 그 문제의 것들이 오히려 교회 지도층인 사제와 수녀들 그리고 교회 기관에 의해 신자들에게 교육되는 일이 빈번하였다. 건강증진이라는 명목으로 기수련이 여기저기서 버젓이 본당 프로그램으로 도입되고 있다. 한국에 뉴에이지 붐을 일으킨 일등공신인 「류시화」의 시가 교회 주보와 방송매체를 통하여 홍보되고 있다고 필자에게 제보를 해온 신자들도 꽤 있었다. 명백한 뉴에이지 음악이 여전히 피정과 전례에 사용되는 일도 많다.
물론, 정확한 정보가 부족해서 일 것이다. 그러기에 필자는 이 귀한 지면을 통하여 그 실상을 알리고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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