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가 소수 지식인들이 앞장서 민주주의의 씨앗을 지켜낸 시대였다면 80년대는 민중이 나서 정의의 싹을 틔운 시대였다. 아울러 민주주의가 독재를 밀어붙이며 승기를 잡아가는 시기였다.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은 이런 가운데 터져 나온 민중의 항거였던 셈이다.
최기식 신부마저 구속되자 원주교구는 물론 교회 전체가 들고일어났다. 만약 최신부가 연루되지 않았다면 이 사건은 역사의 뒤안길에서 쓸쓸히 지워져 갔을 것이며 주요 혐의자들은 틀림없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을 터이다. 사건 초기부터 당국이 간첩에 의한 사건인 것처럼 대대적으로 보도한데다 정권의 폭압정치로 민주화단체가 거덜난 상태였기 때문에 변호사 선임조차 쉽지 않았다. 정평위 소속 변호사들이 중심이 돼 변론에 나섰다. 변론을 위해 황인철 홍성우 변호사 등과 함께 부산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변론 준비를 했다.
이 사건의 최고 쟁점은 성직자의 윤리와 실정법에 관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주교회의는 「최신부의 행위는 사제로서 최선의 길이었음을 확신한다」는 내용의 입장을 밝혔다. 재판과정에서는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반미 문제가 가장 민감한 요소였다. 그래선 지 검사는 피고인들의 진술이 광주 부분에 이르면 신경질적으로 진술을 제한했다. 공소장 어디에도 「광주」라는 단어가 없을 정도로 광주학살은 정권에 약점이었던 것이다. 현실이 이러함에도 대부분의 언론매체들은 정권의 의도만을 반영해 사건 관련자들을 좌경용공분자로 몰아갔다. 이로 인해 사건의 진실은 가려지고 교회 안에서조차 비판의 목소리가 나왔다. 대부분의 국민들도 전후사정을 모르다 보니 비난의 화살을 교회로 돌려 신부와 수녀들이 대로변에서 공공연히 봉변을 당하는 일이 생기기까지 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었다.
「빨갱이 만들기」는 유신시절에도 적지 않았지만 5공화국의 좌경용공 조작은 한층 무자비하고 광범위했다. 전두환정권은 1972년부터 시작된 순수한 신앙공동체마저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공동 생산.분배.소비의 사회주의 조직으로 몰아갔고(한울회 사건), 딸 아람이의 백일잔치를 반국가단체 결성 모임으로 둔갑시키는(아람회 사건) 등 물불을 안 가리고 민주화운동의 씨앗을 말리려 덤벼들었다.
1986년 정국은 직선제 개헌투쟁으로 들끓고 있었다. 정권의 무자비한 살육과 탄압도 분출하는 국민들의 민주화 열기를 꺾지 못했다. 신한민주당의 개헌추진위원회 경인지부 결성대회가 운동권의 시위로 무산된 5.3 인천사태는 재야 세력에 대한 정부의 대대적인 검거로 이어졌다. 이 해 6월에 발생한 권인숙 성고문사건은 바로 5.3 사태의 여파였다. 이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 경찰이 성고문을 자행했던 것이다.
권씨 변호인단의 한 사람으로 참여한 나는 권씨의 당당하고 희생적인 용기가 놀랍기만 했다. 그러던 10월말 나는 안기부에 연행되었다. 5.3 사태로 수배 중인 이부영씨를 숨겨주었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씨를 숨겨준 건 내가 아니라 고영구 변호사였다. 고변호사에게는 여든이 넘은 어머니가 계셨는데 혹시 이씨가 잡히게 되면 고변호사는 물론 그의 집안이 풍비박산 날 게 염려돼 사전에 내가 숨겨준 것으로 둘러대기로 했던 것이다. 구치소에 있는 동안 김추기경이 면회를 오셨다. 고민이 많을 수밖에 없는 내 처지를 말씀드리니 『그러니까 당신이 더 훌륭하다』는 말만 해주셨다. 그래서 교회의 사면을 미리 받았다고 여기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재판에 임했다.
그 해 겨울을 감옥에서 나고 이듬해 5월에 석방돼 나오자 내게는 심부전증이라는 고질병이 따라붙게 됐다. 어쩌면 이 또한 하느님이 주신 훈장이었는지 모른다. 이런 가운데 역사에 뿌려진 선한 이들의 피는 불의한 권력을 추락의 늪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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