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자매님 이야기
두 달쯤 전 어느 자매님으로부터 급한 전화상담요청이 왔다. 경황이 없는 중이었지만 한 영혼의 구원이 달린 문제라 만사를 제쳐놓고 기도하는 심정으로 임했다. 자매님은 「단월드」에서 단학수련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자매님은 막 「고급수련」을 하게 되면 건강, 사업, 영성의 세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다는 유혹을 「단월드」(=단학선원) 사범으로부터 받고 있는 중이었다. 그만큼 성당에 대한 회의와 반감이 고조되고 있던 처지에 있었다.
필자는 차근차근 문제를 짚어주고 다시금 신앙에로 돌아오는 결단을 내려야한다고 독려하였다. 크게 갈등하던 터였지만 자매님은 놀랍게도 해냈다. 그리고 이메일을 통해 장문의 편지를 띄워 보냈다. 이 편지에는 신흥영성운동(뉴에이지)의 핵심 문제들이 잘 드러나 있었다. 좀 길어서 한 번에 인용하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단락별로 끊어서 소개하면서 그 시사하는 교훈을 독자들과 함께 나눠보고자 한다.
첫째, 특별한 경계심이 없다
자매님은 이렇게 시작한다.
『찬미예수님! 안녕하세요 신부님.
신부님께 고맙고 너무도 감사하여 저의 마음을 글로 올립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6월 14일 월요일 오후에 신부님께서 저에게 친히 전화를 주신 것은 신부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저에게 주신 주님의 은총이었나 봅니다. 제가 참 오만하여서 「하느님의 뜻」이니 「주님의 은총」이니 하는 표현을 잘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참 지혜롭지도 못하고 깨달은 바도 없으면서 그런 척 하고 산 사람인 듯 합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이 겪는 오류는 아마도 다 겪은 듯 합니다.
그리하여 「난 헬스도 에어로빅도 할 수 없어, 조용히 품위 있게 단전호흡이나 하는 것이 제일 어울려」란 착각 속에 처음엔 정말 운동으로만 생각하고 단학을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좀은 불안한 마음이 있어 보좌신부님께 의견을 물었을 때 순수한 운동의 목적이라면 해도 무방하리는 의견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난 절대 다른 사람들처럼 심취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구요』
평소 건강이 문제였던 자매님은 커다란 경각심이 없이 단전호흡 수련을 받기로 결심하였다. 그래도 혹시 잘못된 것은 아닐까하는 의문이 들어서 자매님은 본당의 보좌신부에게 문의를 하였다. 하지만 보좌신부는 정보의 부족으로 오히려 허락 또는 권장을 해주는 셈이 되고 말았다. 내심 불안하기는 했던 자매님은 설사 잘못된 것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신앙 정도면 「심취」하지 않을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일단 등록을 하였다. 이처럼 정보의 부족은 경계심을 풀어놓는 원인이 되고 있다.
▲ 신흥영성운동에 대해 사목현장에서는 아직도 무지, 혼돈, 방관 속에서 무대책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둘째, 야금야금 빠져든다
『하지만 안개에 옷 젖듯이 젖어든 듯 합니다. 1월부터 5개월 남짓 단학을 하면서 몸은 명현(?)이라는 것으로 너무도 아팠고 마음은 무척 부대끼었습니다. 모든 것을 그냥 그렇거니 하면 마음이 편해지는 듯하나, 의문을 가지면 가슴은 조여 오고 우리 본당신부님의 강론은 귀찮게만 들리고 성서에 대해서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부정적으로 이해되고 더욱 놀라운 것은 제가 젊은 시절에 그토록 어렵게 읽었던 샤르댕 신부님의 저서(?)들이 너무 쉽게 읽혀지는 것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는 모든 책들이 마치 명오가 열리듯이 이해되는 듯했습니다. 그리고 도올(김용옥)의 강의에 심취가 되기도 하고 「아 그래 맞아 진리일 수도 있어」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마음은 온갖 상념들로 가득차서 「이러다 내가 미치지, 차라리 가톨릭을 떠나 버릴까」하는 단계에 까지 이르렀습니다』
자매님의 예는 수련을 하다보면 야금야금 자신도 모르게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확신이 허물어지고 혼란에 빠진다는 사실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신흥영성에 빠지면 처음에는 사제들의 강론이 시시하게 들리고, 전례가 죽은 예식처럼 여겨지고, 가톨릭교회의 주장들이 옹졸하게 들리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저들의 주장이 대단한 대안이나 비전인 것처럼 들린다. 신본주의 대신에 인본주의, 타율영성 대신에 자율영성, 한 종파 대신에 우주적 통합 종파 등을 내세우는 거창한 말들이 너무 매력있게 들리는 것이다. 신(흥)영성은 종교혼합주의적인 접근법을 쓰기 때문에 신자들에게는 거기에 통합, 통일, 완성이 깃들어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
이 때문에 기성종교는 답답하고 고리타분하고 편협해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부분」의 도용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지적하는 뉴만 추기경의 말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여러분은 전체를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전체를 거부해야 한다. 축소하면 약해지고, 절단하면 불구가 된다. 각 부분이 결합되어 전체를 이루므로, 어느 한 부분을 빼놓고서 전체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뉴만 추기경, <발전에 관하여>, 레지오교본 196쪽에서 재인용)
신흥영성운동은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씩 가져다가 버무려서 「퓨전」 영성을 만들어 놓는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하고 현대적이고 매혹적일 수 있다. 뭔가 갈증을 풀어줄 것처럼 보인다. 상대적으로 기성종교의 구태의연한 모습은 실망을 줄 뿐이다. 식상하고 맛깔스럽지 못하게만 여겨진다. 슬슬 불만이 하나 둘 늘기 시작하다가 마침내 「작별」의 유혹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그렇게 매력적이던 것이 결국 「독버섯」 영성이었다는 것을 알아챘을 때는 더 이상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 속에 허우적거리는 자신을 발견하기 십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