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의 성모신심은 교회 창설기 때부터 형성, 박해시기를 거치면서 놀랍도록 급성장했다.
천주교 박해 시기에 작성된 선교사들의 서신을 보면, 파리외방전교회에 묵주와 성모상, 그리고 성모 마리아의 상본을 보내달라고 요청하는 내용이 눈에 띄게 나타난다.
또한 박해 당시 조정에서 천주교인들로부터 압수한 물품 목록을 작성했던 「사학징의(邪學懲義)」를 보면 많은 순교자들이 묵주와 성모상본을 지닌 채 체포되었다고 기록돼있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압수한 성모상과 묵주를 통행이 잦은 성문 입구 바닥에 늘어놓고 이것을 밟고 지나가면 천주교인이 아니거나 배교자가 되는 것으로 보았고, 밟지 않고 지나가면 신자이니 즉석에서 참수하라고 지시하여 시행한 적이 있었다. 이러한 모습은 신앙 선조들이 마리아의 전구를 통해 신앙을 증거하고 신심을 지켰던 것으로 추측케 해준다.
박해시대 때 이루어진 성모신심은 매우 짧은 시기 동안의 교리교육과 기도생활임에도 불구하고 신자 개개인에게 강한 정체성을 심어주었다. 성모상이나 묵주를 밟고 지나가기만 하면 목숨을 구할 수 있는 상황에서 우리 선조들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성모송을 봉헌하였다.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 주교는 이러한 한국 신자들의 성모신심을 칭송하고, 1838년 교황청에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를 조선교회 주보로 정해줄 것을 요청한다. 이후 교황청이 1841년 조선교구 주보로 성모 마리아를 선포함으로써 한국의 성모신심은 더욱 활성화 됐다.
1953년 5월 31일에는 광주교구장 서리였던 현 하롤드 핸리 주교에 의해 한국에 레지오마리애가 들어왔다. 레지오마리애는 한국전쟁으로 인해 많은 사제와 수도자의 희생으로 막막했던 사목현실에 큰 디딤돌이 됐으며 레지오마리애 특유의 강한 조직력으로 인해 성모신심이 더욱 확고해진 것도 사실이다.
또한 1984년 한국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명동성당에서 한국의 겨레와 교회를 성모마리아에게 봉헌하는 장엄 예절을 거행하면서 성모신심은 특별한 모습으로 한국교회 안에 인식되어졌다.
교회 창설기 때부터 혹독한 시련속에 성장해온 한국교회는 이처럼 성모마리아께 대한 신심과 깊은 관계를 맺어오면서 성모님을 통해 하느님께 나아가는 보다 넓고 깊은 성모신심이 전개된 것이다.
한국교회의 성모신심은 순교라는 전적인 봉헌의 현장에서 탄생했다. 하지만 오늘날 성모신심에 관한 학문적·신학적 연구는 극히 미비하며, 성모신심의 토착화를 위한 노력이나 서적 및 연구활동 또한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레지오마리애가 한국에 도입된지 50년이 넘었지만 양적인 성장에 비해 단원들의 자기 성화와 영성에는 큰 변화가 없다는 지적도 많다.
단순히 묵주기도만을 하는 차원에서 벗어나 성서 안에서 그리고 성서의 가르침과 구원의 역사 안에서 구체적으로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찾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성모승천대축일을 맞은 오늘, 성모신심을 통해 박해를 극복한 선조들의 신앙정신을 본받아 신앙쇄신을 향한 새로운 도약의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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