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역사적 사실을 두고 얼마나 벌어져있을 지도 가늠하기 힘든 인식의 거리를 숱하게 머릿속에서 재보며 피해의 한가운데 서있었을 일본 나가사키대교구 초청으로 나선 순례길은 적잖은 감상을 품게 하기에 충분했다.
50여명의 한국신자들 한복입고 동참
순례단의 발걸음이 가 닿은 곳은 8월 9일 피폭 59주년을 맞아 제22회 평화기원제가 열린 나가사키대교구 우라카미(浦上) 천주당. 1914년 건립돼 동양제일을 자랑하던 이 성당은 59년 전 피폭의 한가운데 있었다. 당시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던 사제 2명과 8500여명의 신자들은 우라카미성당과 함께 생을 마감했다. 폭발로 성당의 종(鐘)이 날아간 곳에 새로 지어진 현재의 성당은 그 때의 뜨거운 열기를 전해주려는 듯 폭염 속에서 한국 순례단을 맞았다. 오후 7시에 봉헌된 평화기원미사에는 그 날의 아픔에 함께 하려는 50여명의 한국 신자들이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동참해 이채를 띠었다.
의정부교구 이한택 주교를 비롯해 서울대교구 사무처장 최창화 몬시뇰, 박홍 신부(서강대학교 이사장) 등 한국 사제 13명이 일본 교회 사제 50여명과 공동 집전한 이날 미사는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평화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하는 장이 됐다.
나가사키대교구장 다카미 미즈야키 대주교는 이날 미사에서 『평화의 길이 험하고 멀더라도 평화 실현을 위해 노력해야 할 의무는 면제되지 않는다』고 강조하고 『우리들은 단순히 평화의 기원자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평화를 실현해나가는 사람이 되어야하며 이것이 곧 주의기도를 실천하며 살아가는 길』이라고 말했다.
원폭 희생자 제단에 초·꽃·종이학 봉헌
미사 후 한국과 일본 신자들은 평화를 염원하는 불을 밝혀 들고 성당 인근의 평화공원(헤이와 코엔)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원폭으로 폐허가 된 시가지를 복구하면서 원폭투하 중심지 언덕에 세워진 평화공원, 그 자리에는 이미 적잖은 일반시민들까지 포함해 2000명이 넘는 이들이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거대한 평화의 기념상이 내려다보는 가운데 열린 피폭 59주년기념 원폭희생자위령제는 원폭의 비극성과 전쟁의 참상을 돌아보게 했다. 신자들은 원폭 희생자들을 기리는 제단에 평화를 상징하는 5개의 촛불을 비롯해 꽃, 원폭으로 오염된 물을 형상화한 상징물, 평화를 염원하며 신자와 비신자들이 함께 접은 종이학 등을 바치며 나가사키가 「평화의 발신지」로 자리잡아 나가길 기원했다.
행사를 지켜본 이한택 주교는 『일본의 신자들이 미래 평화를 위해 애쓰는 모습에 감명을 받았다』고 밝히고 『교회가 민족 사이에 깊게 패인 감정과 국가간의 갈등을 해소해나가는데 꾸준한 역할을 해나가면 좋겠다』고 말했다.
광기의 역사에 마침표를 찍은 나가사키 원폭의 기억은 테러의 공포에 휩싸여 있는 전 세계를 향해 한국과 일본 교회가 함께 지고 가야 할 평화의 의미를 전해주고 있는 듯했다.
▲ 원폭희생자위령제 행사 중 평화를 염원하는 신자들의 기도가 바쳐지는 가운데 이한택 주교(위 오른쪽 첫번째)를 비롯한 신자들이 야광봉을 들고 평화의 길에 함께 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 위령제 행사 중 원폭 희생자들을 기리는 제단에 평화를 염원하는 상징물을 바치고 있다.
▲ 위령제 말미에 희생자들을 위해 초와 향을 바치고 있다.
▲ 한 일본인 수녀가 희생자들을 생각하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
▲ 평화를 염원하며 신자들과 일반인들이 함께 접은 수만 마리의 종이학을 원폭 희생자 제단에 바치고 있다.
◆ 나가사키대교구 순례참가 김태선씨 가족
"일본교회 신앙심에 놀라 교세 작다 무시했는데…"
『일본 천주교회를 새롭게 보고 이해할 수 있게 된 계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부인 서연숙(로렌시아.53)씨를 비롯해 큰딸 김은지(카타리나.27)씨, 막내 김은희(10.안나)양 등 일가족 3명을 이끌고 나가사키대교구가 주최한 평화기원제에 참가한 김태선(세실.59.천안 원성동본당)씨는 3박4일 순례기간 내내 일본 교회의 가려져 온 면모에 탄복을 금치 못하는 모습이었다.
무엇보다 김씨 가족을 매료시킨 것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빤히 그 결말이 내다보이는 전쟁마저 마다하지 않았던 일본 신자들의 적극성이었다.
『그들이 목숨과 바꿔 지키려했던 신앙이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해보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너무 편안한 신앙생활에 안주하고 있다는 느낌이 적지 않습니다』
가족끼리 자주 국내 성지순례를 했다는 김씨 가족은 휴가를 맞아 용기를 내 나선 첫 해외성지순례지가 일본이라는 점에도 나름의 의미를 부여했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음에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어쩌면 지금의 교세만 보고 조금은 무시하듯 생각해온 일본 교회의 역사를 돌아보며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은지씨에게는 이번 순례가 오랜 냉담을 접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저렇게 처절한 순교의 길을 걸어가며 신앙을 지키려했던 이들도 있는데…. 아마 저라면 그렇게까지 하지 못했을 거예요』
성지 곳곳에 조성된 순교자기념상과 성화 등에서 용케 소년소녀 순교자들을 발견하고는 『왜 아이들도 저기 있느냐』는 물음을 던져 일행에게 웃음을 머금게 했던 순례단의 막내 은희양도 순례를 마감할 즈음에는 부쩍 성숙한 모습이었다.
『우리가 그 때 태어났더라면 우리도 저들처럼 할 수 있었을까요?』
김씨 가족이 순례기간 내내 떨쳐버릴 수 없었던 물음은 고스란히 함께 한 모두에게로 전해져오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