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자매님 이야기 2
셋째, 하느님을 부정하기에 이른다
자매님은 말한다.
『하여 그들이(단학) 그토록 집요하게 요구해왔지만 계속 거부해 왔던 「심성수련」이란 것을 다녀오겠노라고 대답을 하고 예비수련이라는 것을 했습니다. 그리고 단학의 사상인 「삶의 의미」라는 이승헌의 비디오를 예를 갖추고 보라 하기에 수련시간이니까 보았습니다. 그것을 보면서도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원장이 저에게 속삭였습니다. 「도우님, 21세기와 앞으로의 세기는 사람이 신의 지배를 받는 시대가 아니라 사람이 신을 지배하는 시대입니다」라고』
우리는 지금 결정적인 대목에 이르러 있다. 여기에는 단월드(단학선원)의 본색이 얼추 드러나 있다.
우선, 이승헌의 비디오를 「예를 갖추고」 보도록 지도받았다는 이야기에서 심상치 않은 우상화(偶像化)의 일면을 인지하게 된다. 본인 자신도 아닌 비디오 제작물을 예(禮)를 갖추고 보게 한다는 것은 이미 그가 신격화(神格化) 되어 있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시사해 준다. 이는 극히 일면일 따름이다. 이승헌은 이미 그들에게 교주를 넘어 신적 경지로서 추앙받고 있다.
다음으로, 「원장」이라는 사람이 자매님에게 무슨 말을 하였던가. 『도우님, 21세기와 앞으로의 세기는 사람이 신의 지배를 받는 시대가 아니라 사람이 신을 지배하는 시대입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올바로 정신이 박힌 가톨릭 신자라면 이 말을 과연 그 원장이라는 사람이 했겠는가 하고 의문을 던져야 옳을 것이다. 하지만 원장은 이 말을 했다. 그가 그렇게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사용하는 말에 용신(用神)이라는 단어가 있다. 이는 자신의 필요에 맞게 우주에 내장된 신적인 능력을 마음껏 끌어다 쓴다는 말이다. 바로 이것을 그는 대담하게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신과 인간,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기본질서를 파괴하려는 발칙한 유혹이다. 따먹기만 하면 「하느님처럼」 될 수 있다는 감언이설로 태초에 이브를 유혹한 「뱀」의 음흉한 간계가 이 말에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기에는 대부분 가톨릭 신자들의 식별력이 턱없이 미흡하다는 점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자매님의 말을 더 들어보자.
『마치 무슨 최면을 거는 듯이 말입니다. 너무도 이상한 것은 그 당시 아무런 저항하는 마음도 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저 빨려 들어가듯 그랬습니다. 그리고 돌아와 거기에 대한 저항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리고 주일에 미사를 마치고 오후에 남편과 함께 「트로이」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물론 신화를 각색한 영화이지만 신이 지배하던 그 시대에 신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주인공 「아킬레스」가 마치 「신은 없다(?)」라고 절규하듯이 사는 모습에서 일전에 단학원장이 저의 귀에다 대고 속삭인 말이 머리가 쭈뼛하며 떠올랐습니다.
마치 머리는 터질 것 같고 가슴은 답답하고 내가 왜 이러지 하면서 마음을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나 무섭고 두렵고 미칠 것 같다는 말 바로 자체였습니다. 이런 말로 저의 상태가 다 표현 되지 못합니다. 그 이상이었습니다. 「정신을 차리자 정신을 차려야지」 하며 스스로를 안정시키기 위해 몸부림을 쳤습니다』
그나마 자매님이 신앙의 기본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것이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신흥영성운동(뉴에이지)의 책자들은 인간 안에 있는 무한한 영적 잠재성, 나아가 신성을 강조하면서 그것을 키워나가야 한다고 부추긴다. 그러면서 슬금슬금 창조신과 인격신을 부정한다. 마침내 신의 노예가 되지 말고 스스로 신적인 존재가 되어서 자신 안에 있는 신성을 마음껏 부리라고 감언이설로 유혹해 댄다. 어설픈 주장 같지만 『자기 인생의 창조자가 되라』, 『강한 자가 되라』라는, 그럴 듯한 미끼를 내 걸고 교묘하게 접근하기에 웬만한 사람은 어느새 넘어가고 만다. 하지만 자매님은 주님의 은총에 힘입어 버틸 수 있었다.
▲ 단학 하는 사람들은 이제 사람이 신을 지배하는 시대라고 현혹한다. 그림은 모든 인간이 그리스도가 될 수 있다는 뉴에이지 사상을 표현한 그림.
넷째, 집요하게 붙든다
자매님은 도움이 필요했다. 지혜로운 결단을 내리기에는 이미 혼돈 속에서 씨름한다는 것이 너무도 벅찬 일이었다. 자매님은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그래서 제가 세 번째 「미래사목연구소」로 전화를 했습니다. 신부님과 꼭 통화를 해야겠다는 일념으로. 저는 그때 그와 같이 절박했었습니다.
신부님께서 저에게 전화를 주신 것은 저에게는 신부님 말씀처럼 은총이었고 빛이었습니다. 신부님과 통화를 하고 즉시 단학에 전화로 「나 단학 그만 하겠노라. 날 설득하려 하지도 말고 왜 라고 묻지도 말고 그냥 이름을 지워주고 회비는 환불해 달라」. 정말 무 자르듯 단호하게 그리했습니다.
(다음날 원장과 단판을 짓는 과정에서의 기 싸움에서는 제가 이겼습니다.
집요하게 수 시간을 설득하던 원장이 먼저 지칠 만큼 제가 단호할 수 있었음은 신부님께서 절 위해 기도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집요하다. 「수 시간」의 설득이 그것을 여실히 드러내준다. 말이 그렇지 수 시간의 입씨름은 결코 만만한 대화가 아니었을 것이다. 원장은 자신이 교육받은 대로 자매님 신앙의 빈 구석을 찾으며 여기 저기 허점을 찔러댔을 것이다. 하지만 자매님은 필자의 코치에 충실했다.
『분명히 호락호락 응해주지 않을 것입니다. 무슨 말을 하든 말려들지 말고 「무 자르듯이 단호하게 잘라야」 합니다. 그래야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