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행동에는 많은 요소들이 작용합니다만 여기에 한 부분을 차지하는 요소들이 본능 감정 기분 습관이란 요소들입니다. 이러한 말들은 그 자체로는 선악을 판단할 수 없는 말들입니다만 실제 쓰여 질 때는 긍정적인 경우보다는 부정적인 경우가 많은 말들입니다.
예를 들면 「본능적인 행동」 혹은 「감정적인 반응」 「습관적인 행동」 등은 그 자체로는 윤리적 선악을 판단할 수 없는 중립적 가치를 가지는 말들입니다만 이러한 말들이 어떤 대상에 적용될 때는 그 대상에 대해 긍정적인 이미지보다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진다는 뜻입니다.
아마 그 이유는 인간의 본능이 선보다는 악으로 기울기 쉽기 때문일 것이고(원죄교리도 첫 인간 아담과 이브의 죄를 우리가 전해 받았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인간이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나는 본능이 악으로 기울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임) 또 다른 이유는 이러한 본능과 습관에 따른 행동들은 힘들여 배우거나 노력할 필요가 없는 행동, 인간의 지고의 가치인 의지가 개입되지 않은 행동이기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이러한 행동들은 행동할 당시에는 즐거움이나 만족감을 줄 수도 있습니다만 그 결과는 후회와 죄책감을 낳거나 아니면 우리가 소망하는 바람직한 결과와는 동 떨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여기서 주의할 점은 본능과 감정 습관 등을 무조건 부정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본능과 습관 등 이러한 요소들은 육체적 생명을 위해서는 상당한 장점을 가지고 있고 특히 가족과 같은 1차 공동체의 삶을 위해서는 필수 불가결한 요소입니다만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본능과 감정을 넘어서는 행위가 본능에 따른 행동보다 중요할 수 있다는 상대적인 의미에서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 추종을 위한 2개의 단절어와 망대 구축과 전쟁 수행의 이중 비유를 들려줍니다.
먼저 예수 추종을 위한 두 개의 단절어.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가족들 뿐 아니라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해야 한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먼저 「미워하다」란 말은 오늘의 우리 식으로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예수님의 모국어인 아람어나 히브리어에서는 비교급이 없기 때문에 덜 사랑하다란 의미를 종종 「미워하다」란 말로 표현합니다. 때문에 여기서는 예수님을 더 사랑하기 위해 가족과 자기 자신을 덜 사랑해야 한다는 비교적인 의미로 보면 됩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진다.
물론 루가는 자기 십자가로 고쳐서 쓰고 있습니다만 분명한 사실은 십자가란 형벌의 도구이기에 목숨 바침을 의미한다는 점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목숨까지 바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철저한 헌신을 요구하는 말씀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할 사실은 가족과 자신을 미워하는 것, 그리고 십자가를 지는 행동들, 이 모두는 우리의 본능이나 감정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아니 본능과는 정반대 편에 놓여 있는 행동들이라는 점입니다.
다시 이야기하자면 인간의 본능은 가족과 자신에 대한 배타적이고 편파적인 애정을 추구하고 있고, 거기에 더하여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욕구는 생명 있는 존재면 무엇이나 본능적으로 추구하는 욕구인데 이를 예수님이 부정한다는 사실은 본능을 넘어서는 무엇이 필요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본능을 넘어서는 의지적인 선택과 같은 인간의 노력과 수고가 필요함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후반부에 나오는 망대구축과 전쟁수행의 이중 비유도 같은 맥락입니다. 망대를 세우거나 전쟁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자신의 상황에 대한 이해입니다. 이것을 무시하고 기분이나 감정에 얽매여 어떤 일을 시작한다면 결국 끝내지 못할 것이고, 끝내지 못한다면 비웃음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이 자연의 이치인데 이는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 비유가 주는 의미는 이것입니다. 제자됨의 길은 일시적인 기분이나 감정만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아니기에 먼저 냉정하면서도 현실적인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는 점을 보여주면서, 예수님을 따르기 전에 먼저 예수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재물과 같은 가장 소중한 것들마저 포기할 용기가 있는지 살펴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이러한 말씀을 하셨을까요? 당시 사람들에 대한 질책입니다. 일시적인 기분이나 감정에 휩싸여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 본능적 욕구의 충족을 위해 예수님을 따랐던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과 오늘의 또 다른 이스라엘인 바로 우리 자신에 대한 경고가 이러한 말씀들이 가지는 의미인 것입니다.
감정과 기분, 본능에 흔들리는 나의 연약한 신앙을 반성해봅니다.
말씀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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