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믿음으로~ 저 산도 옮기리 믿음으로』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8월 여름, 숲이 울창한 전북 정읍 회문산 자락에 성가소리가 울려퍼졌다. 전주교구 신태인본당(주임=김병환 신부) 신자들이 성 김대건 신부의 동생 김난식(프란치스코)과 조카 김현채(토마스)의 묘소를 찾아 미사를 봉헌하고 있었던 것.
이들은 매월 첫째주일이면 박해를 피해 살았던 선조들의 삶의 터전을 찾아나서고 있다. 본당 75년사를 편찬하면서 본당의 뿌리였던 선조들의 숭고한 삶과 정신을 되새겨보자는 마음에서다.
특히 신태인본당 지역은 1866년 병인박해 때 충청도에서 박해를 피해 내려온 신자들이 교우촌을 이루며 살았던 곳이기에 본당신자들은 더욱 애착을 가지고 역사 찾기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뜨거운 태양볕에 수건으로 흐르는 땀방울을 훔치며 산을 오른 이들은 옛 신자들의 애절한 삶과 신앙을 생각하며 순례길에 나섰다. 이름 석자 제대로 남기지 못하고 숨져간 많은 신앙선조들의 발자취를 찾을 때마다, 마음 한켠이 뭉클해진다고.
김대건 신부의 가족묘라지만 이곳은 여느 성지나 순교자들의 묘소와 달리 푯말하나 제대로 부착돼있지 않았다. 오르는 길 내내 낫으로 길을 만들고, 물어물어 찾아갈 정도로 산세가 험해 정말 이곳이 맞을까 하는 의문마저 생길정도.
묘소에 다다른 신자들은 듬성듬성 자란 잡초를 제거하고 묘소앞에서 함께 미사를 봉헌했다. 비록 성인도, 순교자라는 칭호도 붙여지지 않은 선조들이지만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모진 박해를 피해 산나물과 풀뿌리로 겨우 연명하며 살다가 돌아가셨을 것을 생각하니 이들도 순교자나 다를바 없었다.
『우리나라의 유명한 성지나 순교자들의 묘소에는 많이 찾아가 봤지만, 정작 제가 살고있는 곳에 신앙 선조들이 머물렀던 장소가 있는지 조차 몰랐습니다』
사목회장 박찬주(마태오.51)씨는 『이곳에 묻힌 김난식과 김현채도 모진 박해를 피해 살다가 돌아가셨으리라 생각하니 그동안 신앙 후손으로서 벌초 한 번 제대로 해주지 못한게 죄스럽다』며 『앞으로는 자주 이곳에 들러 신앙선조들의 삶을 배우고 닮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이들 묘소외에도 회문산 일대에는 선조들의 발자취가 담긴 크고 작은 공소(교우촌)가 58곳이나 된다. 물론 오늘날 살았던 흔적만이 남은 곳이 대부분이지만, 그 안에 묻어나는 선조들의 삶의 자취는 후세를 살아가는 신자들에게 또 다른 생각에 젖어들게 한다.
선조들의 옛 공소터를 방문하기 시작한 지난 6월, 본당 신자들은 동막골에서 오룡촌 공소까지 2시간 가까이 걸으며 옛 신자들의 애절한 삶과 신앙생활을 묵상했다. 말이 2시간이지 미사와 공소예절에 참례하기 위해 매일 걸어왔을 길이라 생각하면, 각 지역마다 성당이 들어서고 자동차로 쉽게 이동하는 오늘날 신자들의 편리한 신앙생활이 오히려 죄송스럽기만 하다.
이날 방문한 오룡촌 공소에서는 1929년 성모승천대축일에 신자 600여명이 고해성사를 하고 300여명의 어린 아이들이 첫 영성체를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하지만 지금 이곳은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은 채 폐허처럼 건물만 덩그러니 남아 있어 세월의 무상함마저 느끼게 한다.
한국에 천주교가 도입된지 220년, 신자 450만명 이라는 가파른 성장을 이뤘지만, 정작 피로 지킨 선조들의 신앙의 흔적들이 이처럼 초라하게 사라져버리는 건 아닌지 신앙 후손으로서 안타까운 마음마저 밀려왔다.
본당 주임 김병환 신부는 『충청도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이곳에 정착해 살았을 정도로 박해시대에 우리 천주교 신자들은 전국적으로 생사를 같이하는 한 가족이었다』며 『하느님께서 역사하신 이같은 조상들의 삶을 소중하게 찾아내고 간직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신부는 또한 『이곳을 순례하고자 원하시는 분은 신태인성당으로 전화를 주시면 기꺼이 안내해 주겠다』며 신앙선조들의 숭고한 삶이 보존될 수 있도록 신자들의 적극적인 관심을 부탁했다. ※문의=(063)571-8201 본당 사무실
■ 김난식(프란치스코)·?
김대건 신부 동생…수도생활
김대건 신부의 친 동생인 김난식(프란치스코)에 대해 교회사는 1827년 정해박해 때 가족이 피난을 다니던 중에 태어난 것으로 전하고 있다. 김난식은 형 김대건이 중국 마카오로 신학공부를 위해 떠나고 그가 불과 12살의 나이였던 1839년, 아버지 김제준(이냐시오)이 순교함으로써 어머니와 함께 어렵게 가사를 돌봐야 했다.
그리고 형인 김대건 신부가 1845년 사제품을 받고 고향에 돌아왔지만 불과 1년만에 순교를 당하자, 어머니 고 우술라와 함께 집도 없이 길거리에서 걸인 행세로 신자들의 도움을 받으며 하루하루를 지내야 했다. 그는 안동김씨와 혼인하여 살다 일찍 사별하였으며 1864년 어머니 우술라가 세상을 떠나자 시신을 형 김신부의 무덤이 있는 미리내에 묻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전라도 정읍 회문산 자락 깊은 골짜기에 있는 먹구니(지금은 마을이 없어졌음)로 와서 박해를 피해왔다. 그는 여기서 토종벌을 치며 생계를 유지했고, 처와 자녀도 없이 수도자처럼 신앙생활을 하다 1873년 4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 김현채(토마스)는?
동정지키며 수양아들 키워
김대건 신부의 큰 집 7촌 조카인 김현채(토마스)는 김난식 보다 2살 위였다. 그는 정해박해와 기해박해를 피해 부모와 함께 떠돌아다니다 아버지를 여의고, 1865년에는 어머니마저 잃게 된다. 이때가 그의 나이 40이었다.
이듬해인 1866년 병인년 대원군의 박해가 시작되자 전라북도 부안군 불무동에 머물다가 김대건 신부의 순교로 회문산 자락 먹구니로 피난, 김난식과 함께 살았다.
그는 이곳에서 10살 아래인 강 막달레나와 혼인했는데, 이들이 서로 동정을 지키며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김현채의 수양아들이었던 김재화의 딸 김금순 할머니가 전하는 말이 교회사의 기록에 남아있다.
『현채 할아버지가 강 막달레나 할머니와 결혼하고도 방 가운데 물을 떠다놓고선 살으셨디야. 「나는 천주께 허원을 했으니까 어떻게 하든지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할머니가 노상 그리셨디야(이하 생략)』
김현채는 이처럼 동정을 지켰고, 이후 1888년 63세로 세상을 떠나자 먼저 세상을 떠난 김난식(프란치스코)의 묘 옆에 나란히 묻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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