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과학과 계시
여기서 단지 이런 이유 때문에 신과학운동 전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엄연히 과학은 과학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과학적 정보는 그대로 인정하되 그 정보를 해석하고 거기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접근법의 한계는 지적할 수 있다. 그동안 과학이 밝혀낸 지식은 전체 지식의 1% 정도밖에 못 미친다고 한다(이것이 과연 얼마나 정확한 수치인지 자체도 불확실하다. 다만 상징적인 의미를 지닐 따름이다!). 이 첨단 과학의 시대에도 일어나고 있는 모든 현상의 1%만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전히 모든 과학적 도구를 동원해도 99%는 미지의 세계로 남아 있다. 그런데 신흥영성운동은 신과학의 이름으로 1%의 정보만 가지고 우주 삼라만상을 설명하려든다. 그리하여 창조주 하느님, 인격신을 축출하고서 이신론(deism)과 자연주의(naturalism)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 한다. 신비(mystery)로 남아 있는 99%의 세계가 시사하듯이 이는 대단히 무모한 속단이다.
99%의 세계가 실존한다는 사실은 인간은 어떤 절대 진리로부터의 계시가 없이는 우주현상을 올바로 파악하는데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로 이끌어 준다. 이는 결국 조작(manipulation)이 가능한 사적 계시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역사성과 합리성을 겸비한 공적 계시의 주제에로 이어진다. 그리스도교는 이 계시를 믿는다. 이를 체계화한 것이 그리스도교의 계시론이다. 이 계시론에 의거할 때 그리스도교는 신흥영성운동이 하듯이 1%의 정보만 가지고 불확실성 속에서 끙끙대지 않고, 99%의 정보를 쥐고 계신 하느님의 비추임(illumination) 속에서 진리 자체를 향유한다.
곁가지 얘기는 이쯤에서 그치고 편지 얘기로 돌아가 보자.
여섯째, 사목적 대응책이 미흡하다.
다시 자매님 이야기이다. 이제 자매님에게 남은 일은 다시 예수님께로, 이전의 신앙에로 돌아가는 일이었다. 그래서 자매님은 고해성사를 받기로 했다. 자매님의 얘기를 들어보자.
『다음날 성당에 구반장 교육이 있어 미사에 참여할 참으로 서둘러 준비를 하고 성당에 도착하니 고백실에 불이 켜있어 성사를 보았습니다. 말을 돌릴 필요가 없었기에 사실 그대로를 고백했습니다. 「신부님 그동안의 몇 달 동안 제가 단학에 심취해 있었습니다. 제 오만함을 진심으로 크게 뉘우칩니다. 머리 숙여 주님께 용서를 청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신부님께서는 「나는 그게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자매에게 뭐라고 해야 할 말이 없습니다. 보속으로 묵주기도 5단 하십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실망감이 좀 들었지만 벅찬 기쁨이 더 컸기에 이에 대한 응답은 분명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멘」』
큰마음 먹고서 고해성사를 받았지만 자매님에게 신부님이 주신 말씀은 뭔가 아쉬움을 남기는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목자들이 기수련의 해악, 특히 단월드 기수련의 폐해에 대하여 전혀 모른다. 그냥 건강을 위한 기수련정도로만 인식한다. 그러니 한 자매가 실존을 걸고 내린 위대한 결단에 공명하지 못한다. 그 곡절, 그 고뇌, 그 긴장에 대하여 전혀 느낌이 없을 수밖에 없다. 아닌 경우도 많겠지만 이는 사실이다. 그래서 심지어는 본인이 기수련을 행하기도 한다. 물론 단월드 지원에서는 사제들이 수련할 경우 매우 조심스럽게 대한다. 가급적이면 운동차원에만 머물도록 적극적으로 권장하지 않는다. 고급단계에 이르면 충돌이나 갈등이 생길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 아쉬움을 더해 주는 것은 사목자들은 신자들이 어떤 문제 때문에 그리고 어떤 갈증 때문에 수련을 하려하는지 크게 고민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것 아니라도 할일이 많기 때문이다. 사제 1명이 수천 명의 신자를 돌보아야 하는 실정에서 충분히 이해가 가는 현실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양을 강도의 위험으로부터 돌보는 것(요한 10, 10~11 참조)은 어떤 이유로도 관면 받을 수 없는 사제의 사명에 속하는 것이다. 신자들이 신흥영성운동에 빠지는 문제는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사목자들은 알 필요가 있다. 가톨릭 교회가 제공하는 기존의 영적 메뉴에서 식상함을 느끼는 신자들,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시달리며 신음하는 신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사목자들은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어야 한다. 정보가 부족하다면 정보를 구해야 한다. 혼자서 해결 방안을 줄 수 없다면 교회 내에서 이런 문제들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전문기관(예를 들면 주교회의 사목연구소)에 문의라도 할 수 있어야 한다.
▲ 신흥영성운동에 빠졌던 신자들이 죄책감에 고해소를 찾아도 많은 사목자들이 공명하지 못한다.
일곱째, 생각보다 많은 신자들이 빠져 있다.
사목자들이 짐작하는 것 이상으로 많은 신자들이 신흥영성운동에 빠져있다. 자매님은 끝으로 말한다.
『신부님, XX만큼 단학의 회원 수가 많은 지원은 없을 것입니다. 그 속에 천주교 신자가 셋 중의 하나는 될 것입니다. 단학을 하면서 그들의 말처럼 혼이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황폐해 가는 것을 몸소 체험 했습니다. 그것도 엄청난 대가를 치르면서 말입니다.
신부님, 제게 도움 주심에 진심으로 머리 숙여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XX에서 000 올림』
실태를 좀 강조하느라고 「셋 중의 하나」라고 말했다고 하더라도 상당히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이렇게 저렇게 신(흥)영성의 그물망에 걸려들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이들 가운데에는 여전히 성당에 잘 나오는 사람들도 꽤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성당에 나오기는 해도 어딘가 모르게 성당에서의 활동과 열성이 약해지고 특히 기도생활이 왜곡되기 십상이다. 전통적인 가톨릭 기도는 시시해서 안하려 하고 주관적으로 명상을 하려한다. 이러면서 점점 예수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친교는 약화되어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