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까지 80여곳 순례
새벽….
창에 드리운 커튼으로 스며들어오는 보랏빛 새벽의 기운. 대기를 통해 전해져 오는 낮은 기도소리가 이 곳이 새삼 성지임을 깨닫게 한다.
성지에서 맞는 아침은 늘 신비로움과 설렘을 던져준다. 온 몸의 세포가 세상을 향해 요동치는 듯한 기분 좋은 떨림에 약간의 흥분이 가미된 이 느낌 때문에 성지순례는 한번 맛을 들이면 헤어나기 힘든 유혹과도 같은 지 모른다. 그래서 이어져온 길이 이제 꼭 4년째. 서울대교구 화양동본당 성지순례 동호모임인 「하늘에서 땅 끝까지」 회원들의 면면에서는 진리의 땅을 밟아온 이들의 흥분이 전해져온다.
「하늘에서 땅 끝까지」가 꾸려진 것은 지난 2000년 9월, 성지순례를 통해 대희년의 감동과 다짐을 이어가자는 데 신자들의 뜻이 모이면서였다. 100곳이 넘는 한국의 성지를 모두 순례하자고 의견을 모은 회원들은 교회사 서적과 성지 책자 등을 참고해 6년8개월간의 야심 찬 계획을 세워 이후 한번도 거르지 않고 매달 첫째 주 월요일 순례길을 떠나왔다. 회원들은 40대 주부부터 70대 노인까지 다양하다. 그간 순례한 성지만 해도 살티공소, 황새바위, 천호성지, 죽산성지, 갈매못, 은이공소 등 80곳이 넘는다. 정기적으로 모여 함께 하는 시간을 갖다보니 어느덧 회원들끼리는 언니, 동생 하는 친가족이 다 되다시피 했다. 4년을 전국의 성지를 찾아 순례하다 보니 이제 웬만한 곳은 지도에다 표시까지 하며 성지의 내력을 설명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른 회원도 한두명이 아니다.
해마다 거르지 않는 회원 피정도 이들의 여정을 살찌우는 데 적잖은 몫을 한다. 순례를 통해 얻은 다양한 체험과 느낌을 승화시켜내는 데는 피정이 적격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모임을 이끌고 있는 최경옥(율리아.54) 회장은 『성지순례는 성지와 교회역사에 대한 견문을 넓히게 할 뿐 아니라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하게 하는 힘이 있다』고 말한다.
이런 이유에서일까, 이들 순례단에는 언제부터인가 거의 빠지지 않고 함께 하는 이들이 있다. 같은 본당이 아님에도 멀리 안산 등지에서 찾는 이들이 그들이다.
이영자(마리아.62.안산 성 마리아본당)씨는 『비록 같은 본당은 아니지만 성지순례를 통해 하나됨을 느낄 수 있어 좋다』며 『가족이 함께 해도 좋을 것 같다』며 성지순례의 매력을 늘어놓는다.
회원들이 올 순교자성월을 맞아 나선 길은 이 땅에 가톨릭교회의 초석을 쌓는데 힘을 보탰던 정약전의 유배지 흑산도. 흑산도는 회원들끼리 예전에도 몇 번이나 순례 대상에 올려놓고도 쉬 결정하지 못했던 곳이다. 교통이 발달한 지금도 차와 배를 갈아타고 꼬박 하루 이상이 걸려야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쓸쓸하게만 느껴지는 흑산도에서 이들은 풀 한포기 자라지 않는 광야 한가운데 서 있었을 예수를 떠올렸을까. 큰 감동에 익숙해진 이들로서는 적잖이 실망스러울 수도 있는 길에서 이들이 찾아온 것은 믿음의 선조들이 잠시나마 머리를 두고 안식을 얻었던 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친근감, 기쁨이다. 순례단은 박해자들이 정치적 반대자들을 쫓아보내던 유배지를 돌아 홍도공소 회장집에서 짐을 풀었다.
『이런 곳에서 신앙의 선조들이 어떤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맞았을까, 고통에 찬 삶을 헤쳐나갔을까를 생각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현재의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이런 생각의 끝은 늘 수백년 동안 마르지 않고 유유히 흘러온 신앙의 발원지를 돌아보게 한다. 그러나 순례길이 이렇게 늘 유쾌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끼가 낀 성모상이나 자주 찾지 않아 황폐화된 성당터, 어디가 어딘지 분간하기도 힘든 성지들을 둘러볼 때면 자신의 잘못인 양 얼굴이 붉어지는 경험을 한 게 한두번이 아니었다. 순례 때마다 성지에 후원금을 꼬박꼬박 내게 된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하늘에서 땅 끝까지」 회원들은 오는 2006년 국내 성지순례가 끝나면 해외 성지순례를 떠날 계획도 세워두고 있다.
『주님이 저희를 데려가시는 그날까지 성지순례는 끝나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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