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신학도로서 그리고 신앙인으로서 「골치 아픈 문제」가 있다. 다름 아닌 악(惡)의 존재에 대한 물음이다. 사실, 그동안 우리가 취급해 왔던 신흥영성운동이라는 주제의 중심부에 바로 이 문제가 자리 잡고 있다. 종교다원주의 시대에 이 문제는 대단히 민감한 사안이다. 그래서 사목자들이나 신학자들도 이 문제만 나오면 은근슬쩍 피하려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하지만 피하기만 할 일은 아닌 것 같아서 가톨릭교회의 공식입장을 소개해 본다.
교리서가 말하는 악의 존재
과연 악(惡)은 실재하는가? 아니면 단지 인간의 머리 속에서 규정된 개념일 뿐일까? 21세기를 살고 있는 가톨릭교회는 이 해묵은 물음에 대하여 어떻게 답하고 있을까? 이 물음들과 관련하여 1992년 바티칸에서 공식적으로 발간되었고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에 의해 1994년 완역·출간된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다음과 같이 천명하고 있다.
『악은 추상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한 인격체, 사탄, 악한 자, 하느님께 대항하는 천사를 가리킨다. 「마귀」는 하느님의 계획과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룩된 하느님의 「구원사업」을 「가로막는」 자이다』(2851항).
이처럼 가톨릭교회는 「악」이 실제로 존재하며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인격체라고 보고 있다. 이는 신약성서의 관점을 그대로 반영한 입장이다. 신약성서는 악(惡)을 추상적인 개념으로 언급하지 않고 「살인자」, 「거짓말쟁이」, 「거짓말의 아비」(요한 8, 44), 「온 세상을 유혹하는 자」(묵시 12, 9), 「악한 자」(마태 13, 19), 「사탄」(마르 4, 15), 또는 「악마」(루가 8, 12) 등의 표현을 써서 실재하는 존재자로 묘사한다.
악마에 대한 신약성서의 이러한 표상은 종말 때에 즈음하여 온갖 악을 동원해 인간을 괴롭히며 인간을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멀어지도록 유혹하는 「권세들」과 거기에 동조하여 타락해 가는 「인간들」 한가운데에 믿는 이들이 처해 있음을 일깨워 준다(한정현, 한국 가톨릭 대사전 8권, 5763쪽 참조).
어디에서 왔는가?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우리는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기도한다.
그리스어로 이 「악(惡)」은 중성 명사로 쓰일 때는 추상적인 「악」을, 남성 명사로 쓰일 때는 「악마」를 의미한다고 한다. 앞에서 보았듯이 교회의 전통은 「악(惡)」이 아니라 「악마(惡魔)」에 무게를 둔 해석을 하고 있다. 곧 하나의 위격(位格, person)을 지닌 사탄의 존재를 말한다.
그런데, 이 악(마)은 어디에서 왔을까? 하느님은 선하시고, 본래 그 창조물도 선했다. 하느님은 악의 창조자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악은 어디에서 어떻게 생겨났을까?
제4차 라테란 공의회(1215)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답한다.
『마귀와 악신들은 하느님께로부터 선한 본질로 창조되었지만 자기들의 탓으로 악하게 되었다』
공의회의 이러한 입장은 그 이후의 공의회에 의해서 뒤집히거나 수정되지 않았다. 이렇듯이 교회는 사탄이 천사로부터 타락하여 생겨났다는 전통입장에 일관성을 견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타락이라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 경위를 은유적으로 시사해 주고 있는 대목을 구약에서 만난다.
『네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지 아니하였더냐? 「내가 하늘에 오르리라. 나의 보좌를 저 높은 하느님의 별들 위에 두고 신들의 회의장이 있는 저 북극 산에 자리 잡으리라. 나는 저 구름 꼭대기에 올라가 가장 높으신 분처럼 되리라」』(이사 14, 13~14).
이 성구에 암시된 타락의 이유 두 가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자기중심적 태도로 자유 의지를 남용했다는 것이다. 실제로는 바빌론 왕의 야망을 꾸짖고 있는 이 성구는 그 배후의 타락심리를 잘 묘사해 주고 있다. 여기서 「내가」 또는 「나의」라는 말이 세 번씩이나 나온다. 이는 자기중심적 야망을 갖고 과욕을 부렸다는 것을 시사해 주는 대목이다.
둘째, 교만 때문이었다. 이 성구에서 『나는 저 구름 꼭대기에 올라가 가장 높으신 분처럼 되리라』는 말은 교만에서 나온 것이다. 이는 타락한 천사가 본래 아름답게 지음 받았고 그 지위가 영화로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피조물인 천사가 아무리 아름답게 지음을 받았어도 자신을 감히 창조주이신 하느님과 비기며 그의 지위를 탐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하느님을 능가하려는 지나친 그 교만이 그를 타락하게 만들었다.
이는 오늘을 사는 우리가 「유혹」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 어떠한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를 역설적으로 가르쳐주는 성서적 교훈이라고 할 수 있다.
악과의 종말론적 싸움
신약성서에 따르면 악(마)의 활동은 종말의 때에 기승을 부린다. 인간들과 권세들이 믿는 이들을 겨냥하여 온갖 악을 일으키는 종말의 시대는 악한 시대이고, 그때는 괴로움과 유혹이 가득한 절박한 때이다(에페 5, 16 : 6. 13).
여기서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할 문제가 대두된다. 곧 이러한 관점이 선신(善神)과 악신(惡神)의 대립구도로 보는 이원론적 입장이 아니냐는 오해의 소지를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면밀히 살펴보면 신약성서의 입장은 결코 이원론적 관점이 아니다. 신약성서가 「하느님 왕국」과 「사탄의 왕국」(마르 3, 22~30) 또는 「빛」과 「어두움」(요한 1. 5 1요한 1, 6~7)과 같은 이원론적인 표현을 통하여 선과 악의 대립을 첨예화시키고 있다 할지라도, 악이 선과 똑같이 대등한 힘을 가졌다는 의미의 형이상학적 이원론은 신약성서 안에서 발견되지 않는다(위의 책, 5764쪽 참조).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종말론적 여정인 우리의 신앙생활이 결코 선과 악 사이에서 벌어지는 막상막하의 줄다리기는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사탄이나 악마는 오직 하느님에 의해 부과된 제한성 안에서만 활동할 뿐이기 때문이다(요한 12, 31 묵시 12, 9).
신앙생활은 낭만이 아니다. 웰빙이 아니다. 신앙생활은 싸움이다. 자신과의 싸움이며 악과의 싸움이다. 그런데 이 싸움은 이미 그리스도께서 이겨놓은 싸움이다(히브 2, 14~15 1요한 3, 8). 물론 그리스도의 이런 승리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최종적인 것은 아니며, 악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가 궁극적으로 성취되는 마지막 때(1고린 15, 24~16 히브 10, 12~13)에 마침내 악의 활동도 종결될 것이다(묵시 20, 2~3?10, 위의 책 5764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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