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영성운동에 대한 성찰을 정리해야 할 때가 되었다. 글을 쓰면서 필자는 영적 식별의 안목을 갖는 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절감했다. 필자는 기도하며 글을 써왔다. 그저 진리에 충실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했다.
「영혼과 정신을 갈라놓고 관절과 골수를 쪼개」는 「어떤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로운」 하느님의 말씀(히브 4, 12)이 임해 주시기를 기도했다. 다원주의 시대의 가톨리시즘을 마감하는 마당에 필자는 다시 예수님께 묻는다. 예수님, 당신께서라면 뭐라시겠습니까?
연민(compassion)의 예수님
예수님은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가이없는 사랑」(디도 3.4 참조)을 전생애를 통하여 드러내셨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만난다.
히브리 성서는 하느님의 이 사랑을 「라함」(영어로 compassion)이라 표현한다. 이는 「애」, 「애간장」, 「애타는 심정」을 나타낸다. 지금도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의 존재를 모르는 이들, 알아도 등지고 사는 이들, 죽음의 늪에서 허덕이는 이들을 향해 「애간장 끓이는」 마음을 품고 계시다.
호세아서는 하느님의 이 마음을 한 마디로 이렇게 표현한다. 『네가 너무 불쌍해서 간장이 녹는구나』(호세 11, 8). 애간장이 녹는 안타까움. 이것이 바로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자비이며 사랑이며 연민이다.
예수님 마음이 바로 이 마음이었다. 이 마음이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과 행동과 기적에 앞서 있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던 군중들의 배고픔을 보시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 안타까워하셨다(마르 14, 14). 한번은 오빠 라자로의 죽음을 슬퍼하는 마르타와 마리아의 친지들 앞에서 그들보다 더한 감정으로 슬피 우셨다(요한 11, 35). 또한 이 「연민」이 병자들과 고통당하는 이들을 위로하시며 병을 고쳐 주시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도록 예수를 내몰았다. 이 연민으로 예수님은 나인 고을에서 『그 과부를 보시고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울지 마라」 하고 위로』(루가 7, 13)하시며 죽은 아들을 다시 일으켜 주셨다. 또한 이 연민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죽음의 형벌」로 낙인찍혀 격리된 나병 환자(마르 1, 41)들에게도 거리낌 없이 다가가게 하셨다.
어느 날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멀찍이서 바라보시다가 장차 예루살렘에 닥칠 비극적인 멸망을 예견하시고 「눈물을 흘리시며 한탄」하셨다.
『오늘 네가 평화의 길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너는 보지 못하는구나』(루가 19, 42).
이 대목이 청년시절 필자의 심금을 울렸다. 예수님의 통곡 속에서 필자는 인간을 향한 무한한 하느님의 연민을 만났다. 그 때 필자는 눈물을 펑펑 쏟고서 사제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 사랑을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열정(passion)의 예수님
예수님의 연민(compassion)은 열정(passion)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이 열정은 세상 사람들의 판단, 상식, 관행을 파격적으로 깨트리는 열정이었다.
-그는 소위 경건하다는 사람들보다도 세리와 창녀, 죄인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다(마태 9, 9~13 참조). 그래서 예수님이 가시는 곳에는 늘 이를 섭섭히 여기던 이들이 꿍시렁거리는 소리가 따라다녔다. 『저 사람은 즐겨 먹고 마시며 세리와 죄인하고만 어울리는구나』(마태 11, 19).
-그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인들의 위선에 대해서는 「눈먼 인도자들」이요 「회칠한 무덤」(마태 23, 27)이라시며 가차 없는 힐난을 퍼부으셨다. 『이 뱀 같은 자들아, 독사의 족속들아! 너희가 지옥의 형벌을 어떻게 피하랴?』(마태 23, 33). 이렇듯이 그들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눈매는 매서우셨다.
-마침내 그의 열정은 의로운 분노로 포효(咆哮)되었다. 예루살렘성전에서 성전장사치들을 대면하셨을 때 예수님은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놓았다며 격노하셨다. 그래서 채찍으로 소, 양, 비둘기를 성전 밖으로 몰아내시고 성전상인들과 환전상들의 탁자와 소, 양, 비둘기 장사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다(마르 11, 11 요한 2, 14). 아무도 상상치 못했던 이 분노의 근원은 「열정」이었다. 『하느님이시여, 하느님의 집을 아끼는 내 열정이 나를 불사르리이다』(시편 69, 9: 요한 2, 17).
-예수님의 열정은 애제자요 수제자였던 베드로의 「꼼수」에 질정(叱正)을 가하실 때도 서슬 퍼렇게 분출되었다. 그 때는 인정이고 사정이고가 없었다. 『사탄아 물러가라.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 8, 33).
연민과 열정 사이에서
이렇듯이 예수님의 사랑은 연민과 열정으로 나타났다. 이 둘은 기막히게 조화를 이뤘다. 연민으로 예수님은 고통 받고 신음하는 이들을 품어주셨다. 열정으로 예수님은 우선과 차선, 참과 거짓을 가르셨다. 하지만 이 둘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모두가 사람을 살리기 위한 것이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는 품을 때는 품고 가를 때는 갈라야 했던 것이다.
필자는 사람의 머리로는 헤아리기 어려운 이 사랑의 양면성을 다음과 같이 묵상한 적이 있다.
『자비와 사랑과 연민으로 가득 찬 예수님 마음 그것을 우리는 예수성심이라 합니다.
여기서 죄인들을 향한 그분의 「연민」, 「측은지심」이 흘러나왔습니다.
여기서 성전 상인들을 향해 회초리를 휘두른 분노의 열정이 흘러나왔습니다.
여기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을 향한 촌철살인의 질타가 쏟아졌습니다.
여기서 억울하고 억울한 십자가형을 받아들이는 순종의 결단이 내려졌습니다. (중략)
우리는 그 성심의 속내를 헤아릴 줄 알아야 합니다. 그 성심의 슬픔과 눈물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 성심의 뜨거움을 느낄 줄 알아야 합니다』(졸저,「여기에 물이 있다」에서 발췌).
예수님께는 좋은 것이 항상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이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시대가 아무리 변하여도 여전히 유효한 예수님의 명령이 있다. 『너희는 그저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라고만 하여라』(마태 5, 37). 또한, 여전히 유효한 예수님의 역설(paradox)이 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나는 아들은 아버지와 맞서고 딸은 어머니와, 며느리는 시어머니와 서로 맞서게 하려고 왔다』(마태 10, 35). 진리와 생명이 걸린 문제에서는 「칼」이어야 한다는 말씀이시다.
하지만 공동선을 추구할 때는 열린 마음이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다원종교의 시대를 살고 있다. 종교간 대화 역시 필요하다. 그 대화의 일선에 계신 분들을 존경한다. 마음이 크신 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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