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대표적인 것이 최근 베스트셀러로 급부상하여 미국에서 700만부, 우리나라에서 50만부 이상이 팔렸다는 책 「다빈치 코드」(댄 브라운, 양선아 역, 베텔스만 코리아, 2004)이다.
이 책에는 『예수는 인간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부인으로 두 사람 사이에는 딸이 있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를 계승하기로 하였는데 베드로가 반발했다』,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게 아니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시온 수도회의 원장(Priory of Sion)으로서 예수에 대한 비밀을 그림을 통해 암시한다』는 등 우리를 당황스럽게 하는 주장들이 실려 있다.
사실 「다빈치 코드」는 외국 추리 스릴러 소설일 뿐이다. 소설은 허구(fiction)이다. 독자에게 흥미를 주기 위해 작가가 꾸며서 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마치 실제인 것처럼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있다. 특히 청소년들과 젊은층에서는 이 책을 읽고 그리스도교 자체에 커다란 의문을 품는다. 신자들일 경우에는 회의에 빠지기도 한다. 이는 이 책을 읽은 대학생들의 부모들에게서 직접 들은 얘기이다.
그러면 왜 한낱 추리소설에 불과한 이 작품이 독자들의 판단을 흔들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이 책이 아이작 뉴턴, 보티첼리, 빅토르 위고, 레오나르도 다 빈치 등의 실존인물과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고대 역사, 비밀단체, 암호 등을 소재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그리스도교인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서양 그리스도교 역사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마치 「다큐멘터리」인 것처럼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한 때는 리처드 레이와 헨리 링컨이 쓴 「성혈과 성배」(1981), 그리고 오강남의 「예수는 없다」(2001)라는 책이 젊은층(대학생) 사이에서 많이 읽혔다. 이들은 모두 (비교)종교학의 접근법으로 그리스도교의 정통입장에 반대되는 주장들을 막무가내로 늘어놓은 책들이다. 「성혈과 성배」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고 프랑스로 망명했으며, 그 후손들이 아직도 프랑스에서 살고 있다』라는 그리스도교 자체를 부정하는 내용을 게재하고 있다. 또 「예수는 없다」는 그동안 그리스도교에서 믿어온 예수는 대부분 허구(虛構)로 판명되었다는 주장으로 일관하고 있다.
▲ 책 「다빈치 코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시온 수도회의 원장으로서 예수에 대한 비밀을 그림을 통해 암시한다』는 등 우리를 당황스럽게 하는 주장들이 실려 있다. 그림의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
바로 알기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부류의 반(反)그리스도교 저술들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첫째로 매우 빈약한 논리로 그리스도교에 흠집을 내려는 부류가 있다. 이들은 성서의 한두 구절을 트집 잡아 일단 「딴지」를 걸고 본다. 그러면 이미 심정적으로 반그리스도교 성향을 가진 이들은 꼼꼼하게 확인도 해보지 않고서 『-라 카더라』, 『누가 그렇다고 하더라』 하며 근거 없는 소문을 퍼트린다. 마침 트집거리를 찾고 있던 「안티」(anti)들에게는 그야말로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하여 누군가 근거 있는 반론을 제기하면 슬그머니 침묵을 지키는 것 또한 이들의 태도이다.
둘째로 비교적 그럴듯한 학문적 근거를 가지고 그리스도교의 기본 교리에 반론을 제기하는 부류가 있다. 이들은 비교종교학자임을 자처하면서 성서학의 연구결과물 가운데 두루 인정받고 있지 못한 이론을 들고 나와 마치 그것이 공인된 주장인 것처럼 논리를 펼친다. 물론 기존의 그리스도교 진리를 부정하는 내용들인 경우가 다반사이다.
필자의 안목에서 볼 때, 두 번째 부류의 주장이 모두 그르다고 말할 수는 없을 듯 하다. 하지만 이런 주장이 결코 객관적이지 못하다는 점은 지적할 수 있다. 특히 성서학 내지 성서해석학의 연구결과들을 인용할 때 그렇다.
필자는 성서학 석사 논문을 써봤다. 그래서 그 당시의 경험에 비추어 어떻게 해서 이런 왜곡 내지 오류가 발생할 수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가령 「부활」에 관한 논문을 쓴다고 해보자. 도서관에 가보면 성서의 「부활」 기사에 대한 많은 관점, 논문, 주석서들이 있다. 이들을 모두 분류해 보면 부활을 곧이곧대로 긍정하는 견해들(O), 부정하는 견해들(X), 그리고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견해들(△)로 나뉜다. 물론 각 주장마다 근거들이 제시되어 있다. 누가 만일 「부활」 문제에 대하여 객관적이고 학문적인 결론을 얻고자 한다면, 당연히 이 모든 견해들을 꼼꼼하고 균형 있게 비교 검토하여야 한다. 그런데 위에서 인용한 책들은 하나같이 하고많은 자료들 가운데 부정적인 견해들(X)만 가지고 결론을 이끌어 내고 있다.
문제는 도서관에서 직접 자료를 뒤져보지 않은 독자가 이런 주장을 접할 때 이를 유일하고 절대적인 사실(fact)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객관적 접근법에 의거한 순수 학문적인 글과 처음부터 그리스도교를 상대화시키려는, 나아가 폄훼하려는 저의가 깔려 있는 의도성 저작물들을 가려낼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하다. 미국의 뉴에이지류의 저작들은 후자(後者)의 관점에서 그리스도교를 허물어뜨리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소설 다빈치코드도 실제로 여기에 속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진위 여부를 떠나 이런 종류의 책들은 베스트셀러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많은 독자들에게 그리스도교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자아내게 한다. 이러한 「아니면 말고」식 딴지걸기의 희생자들은 정보가 짧은 우매한 대중들이다. 물론 여기에는 순진한 가톨릭 신자들도 꽤나 포함되어 있다. 이는 젊은층 사이에서 교회를 떠나는 비율이 갈수록 증가하는 원인 가운데 하나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리스도교의 역사 이래 이런 종류의 저작들은 어느 시대나 있어왔다. 결코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하지만 오늘날 문화의 전반적인 흐름과 미디어의 가공할 영향력을 고려할 때 근래에 목도되고 있는 반그리스도교적 저작물들의 주장을 방관만 하는 것은 직무유기라고 생각된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개신교계에서는 이미 여러 목사님들이 나서서 좋은 반론들을 제기해 주었다. 허호익의 「예수 그리스도 바로보기」, 박진호의 「그런 예수는 없다」, 어윈 W 루처의 「다빈치 코드 사기」, 제임스 L 갈로의 「다빈치 코드 깨기」 등의 책들이 그것이다.
필자는 가톨릭계에서도 위의 목사님들처럼 누군가가 나서 주기를 기다려 왔다. 신자들이 혼돈에 처해 있을 때 그 신자들을 구해주는 것은 의당 교회의 의무라고 믿는다. 그래서 그 누군가가 꼭 나타나기를 고대하여 왔다. 하지만 마냥 기다리기만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필자의 근간 「이것이 가톨릭이다: 진리는 흔들어 대도 진리」(가톨릭신문사, 2004)에서 요즈음의 반그리스도교적 저술들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논박을 꾀해 봤다. 이 책을 통해서 필자는 소설 「다빈치 코드」를 위시한 여러 저술의 주장들의 허구를 역사적 및 성서적 근거로써 드러내 보고자 하였다. 미흡하기 짝이 없지만 「이 대신 잇몸」의 역할이라도 해줬으면 하는 조그만 희망에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