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는 죽음을 「기억으로부터의 단절」이라는 멋진 말로 정의해주었다. 「기억」이 소중한 이유는, 그러므로, 기억속의 그 사건과 사람 때문이 아니라, 그 시간과 공간 안에서 녹아있는 나 자신의 존재감과 그 관계에 대한 구체적 확인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번 주에 살펴볼 아가의 둘째 노래는 사랑의 추억을 기억하는 내용으로 되어있다. 기억은, 현재적 실존을 감당할 수 있는 힘임을, 그리고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순간을 놓치지 않게 하는 구체적 동인임을 잘 가르쳐주고 있다. 지금 이 순간이, 언젠가 다가올 그 시대를 감당할 수 있게 할 「기억」이 될 것임을 「기억」하는 것, 「현재」가 가지는 가장 유효한 가치이며 의미는 아닐는지.
2, 8~17(두번째 시)
둘째 시는 지난 봄, 자신을 찾아왔던 연인을 회상하는 여주인공의 노래로 시작된다. 봄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에, 전체적으로 감미롭고 따스한 느낌을 준다.
초반에 등장하는 「산, 노루, 젊은 사슴」(8~9절) 모티브는 마지막 구절인 17절에 다시 반복됨으로써, 전체적인 틀(인클루시오, inclusio)을 형성하고 있고, 시간적 배경을 아침-낮으로 설정하고 있어서, 밤 이야기가 시작되는 3, 1이하(세번째 시)와 뚜렷이 구분된다.
노래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는 것으로 시작된다(8a절). 여인은 그 목소리가 사랑하는 연인의 소리임을 즉시 깨닫는다. 자신을 찾아오는 연인을, 산과 언덕을 「뛰어넘는 노루와 젊은 사슴」으로 표현한데 이어, 9절 b에서는 「담벼락과 창문 뒤에서 기웃거리는」 모습으로 묘사한 점이 흥미롭다.
힘차게 달려온 노루가, 담벼락 뒤에서 그녀를 조용히 응시하고 있다는 설정인데, 동적인 성향과 정적인 모습을 결부시킴으로써, 활기차고 날렵하지만 동시에 무례하지 않는 연인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10절 b에서 남자는 직접 화법으로 말을 건넨다. 『나의 애인이여, 일어나오. 나의 아름다운 여인이여, 이리 와주오』.
이 표현은 13절에 다시 반복되고 있는데, 물론, 이 말은 남자가 직접하는 이야기라기보다 여자가 기억하고 있는, 혹은 환상 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로 이해할 수 있겠다. 11~13절에 등장하는 봄에 대한 묘사는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자연관련 묘사 중 가장 아름다운 본문 중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마치 슬라이드를 보듯이 풍경화를 연달아 보는 듯한 효과를 주기 때문이다. 초반부에서 「젊은 사슴」으로 묘사되었던 남자는 이제 자신의 여인을 『바위틈에 있는 비둘기』로 표현한다. 전통적으로 비둘기는 평화와 온유를 상징하고, 동시에 봄이 왔음을 알리는 전령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제비가 날아오면 봄이 시작되었음을 알듯이, 팔레스티나에서는 비둘기를 통해 봄이 왔음을 인식했던 것인데, 연인은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왔음을 상기시키면서, 「바위 틈」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그녀(비둘기)에게 어서 나올 것을 촉구한다. 그들의 사랑이 자연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15절에는 갑자기 「작은 여우」들이 등장하여 포도원을 망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물론 이 표상은 포도원이 상징하는 것(여성의 몸 혹은 그들의 사랑)과 그것을 방해하거나 위협하는 것(여우)에 대한 은유로 볼 수 있다.
16절에 등장하는 『나의 연인은 나의 것, 나는 그이의 것』이라는 표현은 전통적으로, 서로의 사랑을 교환하는데 사용된 고유 표현이다(6, 3 7, 11). 이 표현은 주로 혼인 계약시에 사용되었으며, 특별히 구약성서 전통 안에서는 이스라엘과 하느님의 관계를 선포하는데 적용되었다.
『주님께서 너의 하느님이 되시고 너는 그분 소유의 백성이 될 것이다』(신명 26, 17~18)가 그 대표적 구절이다. 둘째 시는 연인을 다시 「베델산」으로 초대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17절). 이 산이 어디에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며, 실제상으로 존재하지 않는 상징적인 산일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모호성은 아가가 노래하는 모든 내용이 꿈과 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다분히 몽환적 상태의 것임을 밝히고 있다.
기억과 삶
아가의 여인은 연인을 실제적으로 만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목소리를 듣고 그를 본다. 그를 기억하고 있기에, 그녀 안에 그가 완벽하게 살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미사때 마다 우리는 『이 예식을 행함으로써 나를 「기억」하라』는 예수님의 요청을 듣고 있다. 상실감으로 삶을 허비하고 싶지 않다면, 삶에 지쳐 생이 바닥나는 혼란에 다시는 빠져들고 싶지 않다면, 방법은 하나 뿐. 언제 어디서고 그분을 기억할 것, 그리하여 내 삶의 질서가 그분이게 할 것. 사소하고 평범한 내 일상이지만, 간절함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아시는 분은, 그분뿐이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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