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의 글에서 「가톨리시즘의 오늘」을 조명하는 가운데 오늘날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는 뜨거운 주제들을 다루어 보았다. 하지만 이 현안들에 대해서도 애당초 다루고 싶었던 주제들이 많이 밀려 있어서 충분히 짚어보지는 못하였다. 아쉬움이 남지만 이제 다음 지대(地帶)로 옮겨가 새로운 여정을 출발해 보고자 한다. 우리를 설레게 하는 탐사구역은 「가톨릭교회의 보고(寶庫)」이다.
밭에 뭍여 있는 보물
필자는 가톨릭교회에 불만이 많았다. 신자들의 영적 목마름과 종교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지 못하는 교회의 무기력, 나태, 무관심 등이 너무도 안타까웠다. 특히 학구열과 구도심이 한창 타올랐던 신학교 시절에는 상아탑에서 지식의 향연을 즐기고 있는 듯한 신학(神學)과 사목현장 일선에서의 단촐한 영적 밥상 사이의 격차가 꽤나 가슴 아프게 느껴져 왔다.
그래서 나름대로 대안(代案)을 찾아 나섰다. 그 과정에서 상당히 오랜 기간 타종교의 영성(프로그램) 언저리를 기웃거려 보기도 하였다. 서적을 통해서는 물론 직접 체험해 보는 것도 불사하였다. 좋은 것이 있으면 받아들여서 우리 가톨릭의 영성 프로그램을 풍요롭게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당시에는 토착화 논의가 고조되고 있던 시기이기도 하였다.
이렇게 한 참을 헤매고 있던 어느 날, 필자에게 한 줄기 빛이 비추어 왔다. 기도를 하는 중에 가슴에서 강렬한 물음이 솟구쳤다.
『네가 새로운 것을 찾기 위하여 다른 종교의 영성 주변을 기웃거리고 있는데, 그러면 너는 가톨릭 영성의 창고(倉庫)는 얼마나 뒤져봤느냐?』
이어지는 물음들이 폭포수 같이 몰아쳐 왔다. 너는 가톨릭교회의 전통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느냐? 복음은 몇 번이나 읽었고, 얼마나 깊이 묵상해 봤느냐? 도대체 2000년 교회사가 배출한 교부(敎父)들과 성인(聖人)들의 신앙과 영성에 대해서는 얼마나 공부했느냐?…등등.
물음이 끝나는 지점에서 마치 원망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들리는 듯했다.
『내가 이미 너희에게 준 것으로는 족하지 않단 말이냐』
이후 필자는 복음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거기서 지혜의 광맥을 만났다. 이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촌철살인의 예지를 만났다. 세상살이에도 통하는 행복의 비결, 성공의 열쇠가 거기 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성사를 뒤집어 보고, 십계명이라는 양파의 껍질을 벗겨보고, 교부들의 고뇌와 성인들의 경지를 헤아려 보려고 그들이 남긴 유품(遺品)을 뒤적여 보기도 하였다.
마침내 필자는 「밭에 묻힌 보물」을 발견하였다.
『하늘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다. 그 보물을 찾아낸 사람은 그것을 다시 묻어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마태 13, 44).
보물이 묻혀 있는 밭은 다름 아닌 전통(傳統)이었다. 2000년 교회의 명맥을 이어온 전통은 확실히 보물밭이였다. 하지만 슬프게도 그 밭에 묻힌 보물들은 그 가치를 볼 줄 아는 사람이 드물어 녹슬거나 먼지가 쌓여있을 따름이었다.
몰라서 그렇지 누구고 이 전통이라는 「밭」 어딘가에 묻혀 있는 그 귀한 보물을 발견하고 그 가치를 알게 되면 있는 것을 다 팔아서 그것을 사게 될 것이다. 그러면 할 수 있을 만큼 하나씩 그 보물들을 발굴해 보기로 하자.
성사, 하느님의 눈높이 사랑
뭐니 뭐니 해도 가톨릭교회가 가지고 있는 보물 1호는 성사이다.
성사의 정의이며 종류에 대해서는 다음에 알아보기로 하고 먼저 예수님께서 왜 성사를 제정하셨는지 그 의의(意義)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하자.
사람은 보이지 않는 가치를 주고받을 때 그것을 담아낼 상징을 사용한다. 그래서 사랑의 표시로서 장미 꽃다발이나 넥타이를 선물한다. 받는 사람은 그 물건들을 받으면서 금세 『아, 이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구나!』하고 알아듣는다. 그리고 선물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 사람의 사랑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를 지닌다.
사람이 이처럼 상징을 사용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을 보고 싶어 하는 속성 때문이다. 형체 없는 그 무엇을 만지고 싶고 느끼고 싶어 하는 심성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인간의 한계와 욕구를 하느님께서는 속속들이 알고 계신다. 그래서 제정해 주신 것이 성사(聖事)인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보이지 않는 사랑을 표현하시기 위하여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는 물건들을 사용하신다.
요컨대, 보이지 않는 거룩한(聖) 은총을 보이는 것(事)을 통해 베푸시는 하느님의 선심(善心)이 곧 성사(聖事)인 것이다. 말하자면 성사는 사랑 많으신 하느님 아빠(Abba)께서 갓난아기와 같은 우리 자녀들과 대화하시기 위해서 무릎을 굽혀 우리와 눈높이를 맞추시는 하느님의 배려심이라 할 수 있다.
넓게 보면 우주만상이 온통 하느님의 성사이다. 그 덕택에 인간은 우주 물질계에서 창조주의 흔적을 읽어 낸다. 빛과 어둠, 바람과 불, 물과 대지, 나무와 열매들은 하느님에 대하여 말해 주며, 그분의 위대하심과 가까이 계심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가톨릭교회교리서 1147항 참조).
성사를 잘못 이해하면 「짐」으로 여기기 쉽다. 특히 「고해성사」는 신심이 깊지 않은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큰 부담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성사는 「은총」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짐을 지우기 위해서 성사를 제정한 것이 아니고 그 짐을 덜어 주기 위해서 성사를 제정한 것이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마태 11, 28).
이것이 우리에게 성사를 제정하신 예수님의 한결같은 의중이었다. 그러므로 성사의 불편함이나 번거로움만 볼 것이 아니라, 그 성사를 통해 얻게 되는 무한한 은총을 볼 줄 알아야 한다(졸저 「여기에 물이 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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