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남겨준 영성은 「복음적 그리스도 중심의 영성」과 「사도적 선교적 영성」 그리고 「작음과 형제애의 추구」로 정리할 수 있다.
프란치스칸들은 특히 「그의 영성이 무엇보다 복음적 삶을 사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성인이 살았던 당시의 13세기 교회는 교황권이 절정에 올라 황금기를 맞고 있었고 지상권 역시 교황권에 예속돼 있었던 만큼 「교회는 그리스도를 대신해 세상을 통치하고 세속의 권세는 영적인 권세인 교황권에 굴복해야만 한다」는 그리스도관이 지배하고 있던 시대였다. 또 교회 모습은 거대한 국가 조직처럼 갖춰져 있었고 신자들 역시 믿음과 삶의 규범으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대신 봉건적 예법과 권위체를 받아들이던 처지였다. 그런 가운데 성인은 하느님을 만나 교회를 다시 세우고 복음이 지닌 진리를 증언하는 철저한 그리스도 중심주의의 삶을 보였다는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복음서를 통해 그 시대 교회에 풍미했던 그리스도관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가난하시고 겸손하시며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것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신 그리스도를 발견했다.
가난하게 사셨고 겸손하게 사셨으며 우리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셨던 그리스도의 모습은 프란치스코 뿐만 아니라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따라야할 그리스도였다.
프란치스코는 또 자신과 초기 동료들을 「아시시의 회개자들」이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회개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인식에 따른 것이었고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며 선포하신 첫 말씀 『회개하라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따르는 것이었다. 실제 프란치스칸들이 교황으로부터 회칙을 구두로 인준받은 후 받았던 첫 공식 소명이 바로 「하느님 나라와 회개와 평화」를 설교하라는 것이었다.
프란치스칸 관계자들은 성인의 「시에나 유언」(Siena Testament)을 정신적 유산의 핵심이라고 말하곤 하는데 그것은 1226년경 성인이 중병에 걸려 시에나에서 아시시로 오는 도중 레 첼레(Le Celle)에서 구술한 것, 즉 『형제들 서로간에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청빈을 언제나 사랑하고 지켜가야 한다. 거룩한 어머니이신 교회의 성직자들에게 언제나 충실하고 순명해야 한다』고 밝힌 것이다. 여기서는 「가난 겸손의 삶」과 함께 성인이 지닌 사도적이고 선교적인 영성, 작음과 형제애의 영성이 잘 드러난다.
프란치스코는 교회 없는 삶을 추구함으로써 이단에 빠지는 오류들이 범해지는 모습을 보면서 그 근본 이유가 교회 안에서의 삶을 택하지 않은데 있다고 보았다. 교회는 결국 그리스도께서 친히 사도들을 주축 삼아 세운 것이고 그런 만큼 교회를 통해 확인되지 않는 삶은 그리스도로 부터도 확인되지 않은 삶이라는 관점에서다.
선교적인 면 역시 13세기 교회 상황과 맞물려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때 유럽내 모든 나라들이 그리스도 교회화 되었으나 「모든 이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선교 사명은 숨죽어 있던 상태였다.
프란치스코는 이에 맞서 본질적 사명인 선교에로 마음을 열고 그리스도의 모습처럼 제자들을 보내 새로운 수도회를 곳곳에 세웠고 그들은 유럽을 신앙심으로 일깨우고 이슬람과 극동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결과를 가져왔다.
「작음」의 모습은 일반 신자들이 프란치스코 성인을 가장 쉽게 떠올리는 이미지. 성인에게 있어 「작음」은 권력이나 특권 지위를 얻으려는 인간적 욕망을 끊는다는 뜻이고 가난과 겸손이라는 덕목을 포함하고 있다. 또 그것은 성서가 말하는 「야훼의 가난한 자」처럼 되려는 바람으로 설명할 수 있다.
프란치스코는 「수도회」보다 「형제회」 개념을 더 중시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한 형제들」이라는 데서 출발한 것인데 「어머니가 자식을 기르고 돌보는 이상으로 형제들 상호간에 기르고 돌보는 정신」을 말한다.
그는 사회적 계급이 분명했고 수도회들 안에서도 신분이 낮은 이들에게는 평수사 직분만 허용하였던 시대에서 「자신의 수도회에서는 아직도 참된 형제애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공동체 안에서 체험되는 형제애의 정신은 성별 계층 계급을 벗어나서 모든 이들에 대한 형제애로 확장 되었고 더 나아가 자연과 우주 만물에 대한 사랑의 개념으로 확대될 수 있었다.
성인은 1224년 9월 14일 라 베르나(La Verna) 산 위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세라핌 천사를 통해 오상(五傷)을 받았다. 손과 발에 나타난 상처에는 연골 형태의 못까지 있었다.
오상으로 인해 고통을 겪는 상황이었지만 프란치스코는 사람들의 회개와 복음 전파를 위해 이탈리아 중부 지역으로 두루 다니는 투혼을 발휘했다.
병세가 악화되면서 임종이 다다르자 회원들은 성인의 원의에 따라 수도회 요람인 뽀르찌운꿀라로 모셨고 1226년 10월 3일 요한 복음의 수난기를 들은 뒤 눈을 감았다.
죽음에 앞서 남긴 성인의 마지막 유언은 「자신의 회개와 복음적 소명에 대해 주님께 드린 뜨거운 감사였으며 하느님께서 친히 형제회를 창설하신데 대한 확인」이었다. 그는 또한 초창기의 완전한 가난 단순 겸손을 회상하며 특히 육체 노동에 대한 기쁨을 회상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프란치스코는 1228년 7월 16일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 시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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