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셋
304년 2월 12일 가르타고 광장에서 사투르니누스(Saturninus) 신부와 48명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재판이 있었다. 31명의 남자와 18명의 여자에게 태형(笞刑)과 아사형(餓死刑)이 선고되었다. 그 이유는 그들이 황제 디오클레시안(Diokletian)의 금령을 어기고 주일 성찬례, 곧 미사를 위해 집회를 하였기 때문이었다.
가톨릭교회의 위대한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1273년 성 니콜라우스 축일에 미사(성체성사)를 집전하던 중 깊은 경이감에 사로잡히는 신비한 체험을 하였다. 그 해 겨울 내내 그는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나아가 그는 자신이 지난 7년간 써왔던 대작(大作) 「신학대전」을 미완성의 상태로 방치해 두고 있었다. 그의 친구이자 제자 하나가 까닭을 집요하게 묻자 마침내 그는 입을 열었다.
『그 때 내가 보았고 나에게 계시되었던 것들에 비하면 그동안 내가 썼던 모든 것들은 덤불에 지나지 않는다네』
성체성사를 거행하던 중 그에게 하느님의 신비 깊은 곳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은총이 주어졌던 것이다. 서양의 저 위대한 학자는 성체 안에 감춰진 그 깊은 비밀을 엿보는 순간 돌연 벙어리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마더 데레사의 증언이다.
『북예멘의 대통령이 나에게 나환우들을 돌볼 수녀들을 보내달라는 서한을 보내왔습니다. 이슬람 국가에서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을 초대한 것은 지난 800년간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나는 신부 한 명이 함께 갈 수 있도록 허락해 주면 수녀님들을 기꺼이 보내겠노라고 답신을 보냈습니다. 왜냐하면 성체(聖體)없이는 우리가 살아 갈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힘 있는 웅변인가. 도대체 성찬례(미사)가 무엇이길래 저들은 목숨을 내어놓으면서까지 그것을 행해야 했을까? 대체 성체의 신비가 얼마나 오묘하길래 그 비밀을 맛본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신의 노작(勞作)을 덤불로 여기게 되었을까? 정녕 성체가 무엇을 공급해 주길래 마더 데레사는 그것이 없이는 자신의 수녀들이 살아갈 수가 없다고 말하였을까?
그게 무엇이관대
그렇다. 성체에는 육신의 생명보다 더 귀한 그 무엇이 있다. 그래서 저들은 그것과 목숨을 맞바꿀 수 있었던 것이다. 성체에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존재원리, 창조(創造)의 비밀, 구원섭리(救援攝理) 등이 고스란히 감춰져 있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성체의 신비 안에서 신, 우주, 인간에 대한 자신의 사변(思辨)이 무가치한 것으로 용해되어 버린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성체는 불가능한 사랑을 가능케 하는 무한한 사랑의 샘이다. 그래서 「사랑의 선교회」 수녀들이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이들을 위해 헌신하기 위해서는 성체라는 특별한 양식(糧食)이 필요했던 것이다.
대관절 이런 일들이 어떻게 해서 가능한 것일까? 이 신비로운 실재(實在)의 근거를 우리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 답을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 안에서 발견한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우리가 그것을 먹으면 영원히 죽지 않을 「영적인 빵」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청했다.
『선생님, 그 빵을 저희에게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요한 6, 34~35).
마지막 작별의 때가 오자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당신 몸을 생명의 빵으로 내어놓으셨다.
『받아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마태 26, 26).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우리를 위한 생명의 양식으로, 「밥」으로 내어주셨다. 이로써 낳으시고 먹이시고 기르시는 하느님 사랑이 예수님의 희생적인 「내어줌」을 통하여 극명하게 드러났다. 하느님의 창조(創造).생육(生育)의 섭리가 예수님의 몰아적 나눔을 통하여 그 절정에 달하게 된 것이다.
이윽고 예수님은 당신 피를 죄의 용서를 위한 계약의 증표로 내어 주셨다.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계약의 피다』(마태 26, 28).
실제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이 말씀을 이루셨다. 이로써 양의 피흘림을 통한 구약의 파스카(희생) 제사가 예수님의 피흘림을 통하여 추월불가능하게 완성되었다. 하느님의 구원(救援)섭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제사를 통하여 궁극적으로 완수되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이 기묘한 사랑의 업적이 모든 세대 안에서 생생하게 재현되기를 바라셨다. 그래서 명하셨다.
『나를 기념하여 이 예식을 행하여라』(루가 22, 19).
그 덕에 우리는 오늘에도 「밥」이 되시는 예수님을 먹으며 살고 있고, 그 피흘리심의 능력으로 날마다의 죄를 용서받으면서 「거룩한 사람」(사도 26, 1)이 되어 감지덕지하게 살고 있다.
▲ 성체는 단지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현상 자체이며 현실이며 진실이며 체험이다.
모든 성사들의 혼
이렇듯이 당신 몸을 내어 주시고 피를 흘리신 예수님의 자기희생을 우리는 「성찬의 원리」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원리는 성체성사(聖體聖事)를 넘어 모든 성사에 스며 있다. 세례, 견진, 혼인, 고해, 병자, 성품 성사 등의 모든 성사는 사실 기꺼이 밥이 되어 주시고 거저 용서해 주시면서 공짜로 베푸시는 예수님의 무한한 희생적(「파스카적」, 「성찬례적」) 사랑의 선물이다. 이런 의미에서 성찬의 원리는 다른 모든 성사들의 혼(魂)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교회는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지극히 거룩한 성체 안에 교회의 영적 전 재산이 내포되어 있습니다』(전례헌장 10항).
가톨릭 신앙생활은 태어나면서 죽기까지 (일곱) 성사들의 징검다리를 밟으며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방금 확인했듯이 성체성사(곧 성찬의 원리)는 이 성사들의 「혼」으로 작용한다. 결국 가톨릭 신앙생활은 성체에 의해서 양육되고 성체의 정신을 사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성체는 예수님께서 바로 오늘 새롭게 행하시는 기적이다. 성 베드로 유리아노 에이말의 고백은 그대로 사실이다.
『성체는 그 대상에 있어 모든 기적들을 능가하며, 그 지속성에 있어 그 어느 것보다 으뜸갑니다. 성체는 영속적인 강생이며, 예수의 끝없는 희생이며, 제대 위에 항상 이는 불꽃(출애 3, 2 참조)입니다. 그것은 만나이며 매일 하늘에서 내려오는 참된 생명의 빵입니다』
신앙생활은 스스로의 힘으로 영위하는 것이 아니다. 마더 데레사가 고백하였듯이 성체의 힘으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요한 6, 56).
성체는 단지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현상 자체이며 현실이며 진실이며 체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