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원주의 시대와 세례
세상은 점점 다원주의화 되어가고 있다. 이와 더불어서 종교의 영역에서도 다원주의 내지 상대주의의 목소리가 점점 커져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종교간 대화를 시대의 명령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는 당연한 부르심이요 요청이다. 현재 여러 창구를 통해 모색되고 있는 우호적인 대화는 앞으로도 계속 발전적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한편, 그리스도 교회는 교회존재의 본질적 사명을 복음증거(Martyria) 또는 선교(Missio=파견)로 이해하고 있다. 복음증거는 필연적으로 세례(洗禮)와 맞물려 있다. 이는 예수님의 마지막 분부에 근거하는 당위이다.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가르쳐라』(마태 28, 19~20).
여기서 민감한 물음들이 생긴다. 대화가 「시대의 명령」이라면 복음증거의 사명은 폐기되었는가? 선교는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는가? 세례는 새 시대의 복음선포에서 관면 받아도 되는 것인가?
많은 신학자들이 이런 문제들을 놓고 고민하였다. 그래서 나온 것이 Missio Dei 곧 「하느님의 선교」라는 대안이었다. 「하느님의 선교」는 「교회의 선교」, 「예수님의 선교」와 대비되는 개념이다. 하느님의 선교는 종래의 복음선포, 선교, 세례를 대신하여 대화(對話)를 우선적인 가치로 보고 사회정의(社會正義)를 위한 투신이 바로 「하느님 나라」를 구현하는 이 시대의 방안이라는 입장을 취한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흑백논리의 위험에 빠져서는 안 된다. 이런 입장이 과연 흑(黑)인지 백(白)인지를 가리는 식으로 얘기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오히려 왜 이런 대안이 나왔는지를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 종래의 복음선포가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던 선교방식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배타주의적 노선에 있었음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이는 종교간 대화에 장애가 되며 사회의 질적 개선에 하등의 기여를 못 하는 한계를 드러냈다. 그래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나온 대안이 바로 「하느님의 선교」인 것이다. 필자는 이 대안(代案)이 차선적(次善的) 선택 또는 결단으로서 정당한 의의를 지닌다고 본다. 틀린 발상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지만 확실히 할 것은 확실히 해 두어야 한다. 차선책은 어디까지나 차선책이라는 말이다. 차선책은 우선적 당위(當爲)가 불가능하거나 힘겨울 때 취하는 방안인 것이다. 차선책은 미완(未完)이다. 차선책은 기회가 있으면 언제나 우선적 당위(當爲)로 지양(止揚)될 필요가 있다.
얘기가 좀 복잡해졌지만 다시 가닥을 잡아보자. 복음선포와 세례는 시대를 초월하는 우선적 당위이다. 이는 교회가 존재하는 한 폐기될 수 없는 사명이다. 오늘날과 같은 종교간 대화의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명령인 것이다. 다만 종래의 무력적, 식민지개척적, 자기확장적 접근법이 아닌 대화와 포용의 접근법을 취해야 한다는 전제조건하에서 말이다.
▲ 복음선포와 세례는 시대를 초월하는 우선적 당위이다. 이는 교회가 존재하는 한 폐기될 수 없는 사명이다. 오늘날과 같은 종교간 대화의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명령이다.
Missio Dei와 Missio Jesu
말이 나온 김에 중요한 주제를 하나 짚고 넘어가 보자. 우리는 앞에서 「예수님의 선교」(Missio Jesu)가 우선적 당위이며, 「하느님의 선교」(Missio Dei)는 이것이 여의치 못할 때 차선적 대안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무슨 근거로 이런 주장을 할 수 있는 것일까? 그 답을 우리는 사도 바울로의 고뇌어린 사변(思辨)에서 발견한다.
바울로는 로마서 2장과 3장에서 Missio Dei와 Missio Jesu의 관계를 명확하게 해명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하느님의 구원활동이 3단계로 진화하고 있음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졸저, 「여기에 물이 있다」, 584~585쪽 참조).
그 첫 번째 단계는 「양심」이라는 단계이다. 이는 율법도 모르고 그리스도도 모르는 사람들을 향한 하느님의 구원활동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의 비밀을 심판하시는 그날에 그들의 양심이 증인이 되고 그들의 이성이 서로 고발도 하고 변호도 할 것입니다』(로마 2, 16).
그 두 번째 단계는 「율법」이라는 단계이다. 이는 그리스도를 모르던 사람들을 향한 하느님의 구원할동 단계이다. 『율법을 가지지 못한 채 죄를 지은 사람들은 율법과는 관계없이 망할 것이고 율법을 가지고도 죄를 지은 사람들은 그 율법에 따라 심판받을 것입니다』(로마 2, 12).
그 세 번째 단계는 「믿음」의 단계이다. 바울로는 이 단계에서 하느님의 구원활동은 「예수님의 구원업적」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본다. 『그러나 이제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는 길이 드러났습니다. …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는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제물로 내어 주셔서 피를 흘리게 하셨습니다』(로마 3, 21~22).
이렇듯이 사도 바울로는 하느님의 구원활동은 「양심」의 단계, 「율법」의 단계, 「믿음」의 단계 순(順)으로 진화되었다고 본다. 그런데 바울로가 이해하는 「양심」의 단계와 「율법」의 단계가 다름 아닌 Missio Dei의 단계이다. 구약(舊約)에 기록된 야훼 하느님의 구원섭리가 바로 이 Missio Dei의 일환인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믿음」의 단계를 우리는 Missio Jesu라 부를 수 있겠다. 신약(新約)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든 구원할동이 바로 여기에 해당하는 것이다.
우리는 구약과 신약을 연대순을 따라 규정하지 않는다. 구약과 신약은 질(質)에 따라 규정한다. 구약은 하느님의 구원활동(Missio Dei)이 비명증적이고 불완전하게 드러나고 있는 모든 질적 시대를 가리킨다. 신약은 하느님의 구원활동이 예수님의 구원활동(Missio Jesu)을 통하여 명증적이고 완전하게 성취되고 있는 질적 시대를 가리킨다.
종교다원주의 시대를 살고 있는 오늘날 우리에게는 여러 가지 형태로 Missio Dei에 동참하기 위해 투신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Missio Jesu를 종말론적으로 성취하는데 헌신하는 것도 자신의 사명으로 여길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구원이 초월 불가능하게 완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복음 그리고 복음선포는 시대를 초월하는 우선적 당위이다.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을 거느리고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마르 8, 38).
그것이 수세(水洗)이든 혈세(血洗)이든 화세(火洗)이든 니고데모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모든 세대를 위한 말씀이다.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 3,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