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땅에서 눈물로 쓴 성탄카드”
알프스 산자락에서 맞았던 새해의 감동…
독일 가족과 함께했던 성탄저녁, 서로 고마워하면서 선물을 나누었다.
나의 성탄이야기라…. 유학시절 낯선 땅에서 쓴 눈물의 성탄카드를 잊을 수 없다. 무뚝뚝한 독일 신학생들 속에서 유일한 아시아계 이방인으로 살기 시작한지 겨우 두 달이 되었을 뿐인데도 무엇이 그렇게 서러웠던지 어머님을 비롯한 가족들에게 성탄카드를 쓰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신나게(?) 흐느껴 울고 나니까 정말 후련했다.
그렇지만 인스부르크에 가서 우리 교구 형제들과 함께 맞았던 그 해의 성탄은 결코 서럽지 않았다. 어디에서나 계시는 주님은 이국땅에도 오셨으며, 그것도 더 절실하게 오셨던 것이다.
성탄의 기쁨 속에서 송년의 밤을 보내고 알프스 산자락에서 맞았던 그 해의 새해는 또 얼마나 멋졌던가! 가족처럼 서로를 얼싸안고 인사를 나누었던 사람들…. 불꽃놀이와 함께 나누던 술잔과 기쁨의 미소, 그리고 희망의 눈길….
작은 마을의 본당 보좌신부가 되고 난 그 다음해부터 귀국 때까지의 성탄미사는 언제나 독일 수녀원과 본당에서 드렸다. 성탄자정미사를 드리고 수녀님들과 인사를 나눈 후에는 한인들과 준비해온 음식을 나누어 먹으면서 노래와 더불어 이야기꽃을 피웠다. 동포들끼리 함께 나눈 위안과 힘이 되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거의 해마다 성탄휴가를 떠난 나이기에 연말과 새해에 대한 추억이 특별하다. 두 번째의 새해는 루르드에서 열린 교구 사제·신학생 피정 후에 스페인을 여행하면서 바르셀로나나 마드리드에서 맞았다. 자정이 되자 그릇과 냄비 등을 두드리고 폭죽을 쏘아 전쟁터를 방불케 하던 찬란한 조명의 밤거리…. 그 속에서 우리는 불꽃탄(?)을 피해 몸을 숨길 수밖에.
다음 해이던가, 내가 살던 곳에서 맞았던 새해가 잊혀지지 않는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을 한 시간 남겨둔 밤, 친하게 지내던 몇몇 독일교우들과 성당에서 기도를 드렸다.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면서 맞았던 그 해의 첫날, 축복으로 포옹을 나누고 제의방에서 샴페인까지 터뜨렸으니…. 주의공현축일엔 어린이 삼왕성가단과 함께 동네를 돌아다니기도 했다.
몇 년 후에는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새해를 맞았다. 송년과 새해맞이에 대한 기대를 안고 시내를 돌아다니다 12시가 되었다. 하지만 그날의 실망이란…. 새날의 시간은 소란 속에서 묻혀버렸으니, 길거리를 가득채운 젊은이들과 술병 깨지는 소리만이 요란했다.
귀국을 앞둔 해의 마지막 성탄저녁은 평소에 절친하게 지내던 독일가족과 함께 했다. 해마다 성탄 때면 칠면조요리는 별맛이 없다면서 오리요리를 준비하던 그 가정, 북경오리 못지않던 그 맛…. 서로의 있음과 사랑에 대해서 고마워하면서 선물을 나누었다.
3년 전, 귀국 후에는 처음으로 본당신부로서 교우들과 함께 성탄미사를 봉헌하였다. 뒤이은 잔치와 불놀이…. 송년미사를 봉헌한 마지막 날 밤에도 또 야외잔치…. 교우들과 함께 기도 속에서 맞았던 새해…. 독일에서처럼 주일학교 삼왕성가단을 조직, 못 치는 기타반주까지…. 고국에서 고국의 교우들과 함께 성탄시기를 보내다니, 그 자체가 나에겐 큰 기쁨이었다.
올해 성탄은 서울에서 수녀님들과 함께 맞게 되었다. 좋은 분들과 함께하는 성탄, 주님이 더 가까이 오실 듯하다. 세상에 살면서 그 세상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차있는 우리에게 주님께서 오신다. 저 세상도 생각하며 살라고 저 하느님 나라에서 구세주께서 오시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자신 안에 구세주를 모시는 복된 성탄이 되기를 바란다. 축 성탄!
조현권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 교수)
▲ 귀국을 앞둔 해의 마지막 성탄, 조현권 신부가 평소 절친하게 지내던 독일가정에 초대받아 성탄파티를 마친 후 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
■ 오르가니스트 박래숙씨
“미사전 성탄메들리 작은콘서트 감동”
어느 성탄이브, 구유예절동안 눈발은 거세지고 우산도 쓰지못한 단원들은 입술까지 꽁꽁 얼었지만 성가는 계속 흘러…
예수성탄대축일과 부활대축일 즈음이면 매일 하루가 어떻게 지나는 지 모를 정도로 분주한 나날이 이어진다. 지난 10여년간 그 흔한 성탄카드 한 장 쓸 여유를 갖지 못할 정도였다.
오르가니스트로서 추억의 편린을 들춰보면 성탄대축일 미사와 그 전야미사는 단연 잊을 수 없는 연중행사로 남아있다.
명동성당 미사는 추기경님과 대주교님이 주례를 하시고 수천명의 신자들, 특히 비신자들이 알음알음 많이 찾아 솔직히 더욱 긴장하게 된다. 또 성탄 때면 마음이 허전해서 성당을 찾는 냉담신자들, 호기심에 찾는 비신자들이 많다.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큰 기쁨을 주기 위해, 나의 연주로 그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위로하기 위해 어떤 힘겨운 과정도 견뎌내리라.
그러나 성탄미사는 대부분 추위 때문에 웃지못할 경험들이 종종 생기곤했다.
벌써 몇 년이 지났을까. 그해 성탄 이브는 유난히도 찬바람이 불고 눈가루가 휘날렸다. 명동성당의 구유 위치는 성당 앞 마당. 언덕 위에 몰아치는 찬바람을 온몸으로 받으며 전야미사 전 구유예절이 이어졌다. 이날 예절에서는 가톨릭합창단 중 특별히 뽑힌 오빠부대(?.나는 나보다 나이어린 합창단원들을 통칭해 오빠라고 부르곤 한다)가 성가를 불렀다. 오빠부대는 초반에 멋들어지게 성가를 불렀다. 그러나 도대체가 신자들의 줄이 끊어질 줄 몰랐다. 아무리 주교좌본당이지만 그날따라 신자들이 정말 많았다.
눈발은 점점 더 거세지고 우산도 쓰지못한 단원들은 급기야 손발이며 입술까지 꽁꽁 얼었지만 성가는 계속 불러야했다. 미사 준비를 위해 성가대석에 있던 나머지 단원들은 발을 동동굴렀지만 도울만한 일도 없었다. 이윽고 오빠부대가 올라오자 수건이며 외투로 감싸안고 손등을 녹여주느라 한바탕 난리를 쳤다.
그때 다가온 또한번의 두려움. 성가대석이 흔들리고 있었다.
명동성당 성가대석은 서양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꼬불꼬불하고 좁다란 일명 「뺑뺑이 계단」 꼭대기에 있다. 성탄전야미사 때면 가톨릭합창단과 돔앙상블 단원들로 그야말로 발디딜틈이 없다. 게다가 팀파니와 콘트라베이스 등 큰 덩치의 악기들까지 꽉꽉 들어차면 성가대석은 그야말로 콩나물 시루. 합창단원들이 들썩일 때마다 흔들흔들 성가대석이 무너지는 듯 흔들렸던 것이다.
급기야 지휘자셨던 백남용 신부님께 『저 오래살고 싶어요』라고 투정을 부렸지만 신부님께서는 『이정도 하중은 끄떡없다』며 태연해하셨다.
그래도 한가지 위로는 나는 그 콩나물 시루에서 조금 벗어난 VIP석(?)을 차지한다는 것이었다. 오르가니스트라는 이유로 거대한 파이프오르간 앞에 떡하니 놓인 큼지막한 의자를 독차지하는 영광을 누린 것이다.
몇분 후, 우리들은 각자 위치를 잡고 미사 전 작은 성탄음악회를 시작했다. 구유예절 후 멀뚱멀뚱 앉아서 자정미사를 기다리는 이들을 위해 본당에서 처음으로 마련한 깜짝 이벤트였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정말 큰 기쁨에 가슴 벅차올랐던 성탄메들리 갈라콘서트였다. 늘 준비시간이 부족해 전례곡을 소화하는데만도 힘겨웠지만 합창단원 등이 워낙 프로들인지라 큰 어려움은 없었다.
전야미사 후 성탄을 맞은 기쁨에 집으로 바로 돌아가지 못하고 서성이는 신자들을 위해 특별곡까지 연주하고 나면 일순간 긴장이 풀린다.
그제서야 합창단과 함께 아기예수께 경배를 드리고 새벽어둠을 벗해 집으로 향한다. 돌아가 쉰다는 기쁨도 잠시, 머릿속에 금새 내일 대축일 미사에서 연주할 곡과 『내일 지쳐 못나오는 단원들이 없어야할텐데』 『늦잠을 자면 안되는데』라는 생각들이 맴돈다.
한두시간이 지났으려나? 어느새 나는 대축일 미사를 준비하며 오르간 앞에 앉아있었다. 이렇게 또 새로운 나의 성탄절은 시작되었다.
『오늘 미사 전례도 하느님 보시기에 좋아야할텐데… 도와주실꺼죠?』
박래숙(말가리다.서울 명동주교좌본당 오르가니스트)
▲ 오르가니스트 박래숙씨는 지난 10년간 성탄카드 한 장을 쓸 여유도 갖지 못할 만큼 예수성탄대축일 즈음이면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