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모든 것은 하느님의 섭리의 손길이라는 점을 세월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느낍니다』
예수 성탄 대축일을 며칠 앞둔 12월 21일 새벽, 교구민들 곁을 떠나간 전 부산교구장 이갑수 가브리엘 주교. 그는 자신의 모든 삶이 항상 하느님의 섭리 안에 머물고 있음을 입버릇처럼 말해왔다.
섭리의 손길을 느낀 첫 「사고」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외갓집에 놀러갔다가 동네 어귀에 흐르던 금호강에서 멱을 감다가 급류에 휩쓸렸는데 다행히 외사촌 누나가 건져올렸다. 또 한번은 부산 범일동본당에서 보좌신부로 있을 때였다. 교우들과 바닷가로 소풍을 나가 점심을 먹으려 수저를 드는 순간, 집채 같은 바윗돌이 옆으로 굴러떨어졌다.
일제에 의해 일본군에 징병됐고, 한국전쟁, 그 시대의 격랑 속에서 수없는 위기와 고비를 넘기면서 도달한 곳은 『모든 것이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섭리의 손길이었구나』하는 깨달음이었다. 그리고 하느님은 구교우도 아니고 신앙의 경륜도 짧은 집안에서 어르신들이 신학교 입학을 권유하도록 섭리하심으로써 영세한지 3년도 채 되지 않은 그가 신학교에 입학하도록 했다.
고(故) 이갑수 주교는 1924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나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1950년 10월 28일 사제품을 받고 부산교구 범일본당 보좌신부로 사목자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그의 이력은 단촐하다. 선종까지 54년의 사제 생활은 미국 유학, 소신학교였던 대구 선목고등학교 교장, 그리고 부산교구장 재임으로 요약된다. 하지만 평생을 바쳐 일군 사목자로서의 삶의 무게는 만만치 않다. 특히 보좌주교와 제2대교구장으로서 30여년간을 몸 바친 부산교구의 오늘은 이갑수 주교의 헌신적인 사목활동이 없이는 불가능했던 것이다.
이주교가 보좌주교로 임명된 1971년, 부산교구는 마산교구의 분할 이후 직면한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던 시기였다. 6월 25일자로 이갑수 신부가 새 보좌주교로 임명되면서 교구는 이를 새로운 출발의 기점으로 삼았다.
공동체 일치를 강조하며 신자 재교육 활성화, 액션 단체 정비, 사제 양성 장학회 설립, 청소년 보호 육성 정책, 그리고 순교 신심 함양을 위한 다각적인 사목 방안들을 추진하던 이 주교는 1975년 6월 28일자로 제2대 부산교구장으로 임명됐다.
기존의 정책과 사업들을 더욱 힘있게 추진해나가면서 가톨릭교육원을 개원하고 순교자 기념관을 세웠으며, 오랜 숙원 사업이었던 가톨릭센터를 건립했다.
교구 설정 25주년이 되던 1982년, 부산교구는 「교구 공의회」를 개최했다. 「신앙 쇄신과 토착화 및 사회 안에서의 교회」를 주제로 1982년 4월부터 2년 반 동안 네 차례의 총회와 65회에 달하는 분과회의를 개최함으로써 교구의 미래 사목 방향을 모색했다.
1987년 1월 부산교구는 설립 30주년을 맞아 또다른 도약의 계기를 만난다. 이주교는 이듬해에는 부산 가톨릭대학 설립을 발표했고, 1990년 12월 24일 정식 인가를 받아 이듬해 3월 첫 입학생을 받게 됐다. 부산가대에서 첫 사제를 배출했던 때를 이주교는 교구장 재임 중 가장 큰 기쁨의 순간으로 기억한다.
이주교는 미국 유학 당시 사회학을 전공했다. 당시에 국내에는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없었다. 고 최덕홍 주교의 명에 따라 사회학을 선택하면서, 이주교는 그것이 선각자의 식견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70년대말부터 부산교구의 지역적 특성에 맞게 해양사목을 활성화하고, 80년대 중반 이후 신앙 쇄신과 지역 사회 복음화 등 미래 지향적인 사업에 특별한 관심과 투자를 아끼지 않았던 것도 역시 시대를 앞서가는 선각자적인 예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주교는 교구장직을 물러나면서 가톨릭신문과 가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국교회의 성장에는 거품이 많았다. 그래서 쇄신 차원에서 교회의 정체성을 되찾아야 하고, 그것은 영성을 되찾는 일이다. 영성이 약해지면 세속의 힘이 강해진다. 지금 세상이 교회를 속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지적은 90년대 들어 영성의 빈곤을 드러내고 있던 한국교회에 던지는 미래 교회의 화두였다. 최근 들어 「신영성운동」 등 빈곤한 영성이 드러내는 교회의 도전들을 정확히 겨냥하고 있다.
이주교는 특히 『성직자들이 신자들보다 덜 열심할 때 그것은 「위험신호」이고 이미 그런 조짐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며 성직자들의 쇄신과 열심을 신랄하게 지적함으로써 사목자들의 쇄신을 촉구하기도 했다.
일도양단의 과단성이나 불도저 같은 추진력과 조금은 거리가 있지만 그가 지닌 따뜻함, 항상 감사하고 기뻐하는 모습은 참된 사목자의 면모를 보여준다. 이주교는 퇴임하면서 소년소녀가장들을 위해 1억5천만원을 교구에 기탁한 사실이 나중에 알려지기도 했다.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감사와 기쁨, 그리고 순명, 이러한 것들이 바로 이주교의 사제로서의 온 삶을 요약해준다.
『내 평생 마지막 깨달음은 머리에서부터 내 발끝까지 영성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내것이다」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이다. 주님 주신 모든 은총은 한이 없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가장 바라시는 것은 천당 가는 일일 것이다. 실제 행동으로 신앙을 증거해야 한다. 기쁨, 행복에 목말라하는 이들에게 실제 행복을 보여줘야 한다. 이것이 가장 효과적인 복음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