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신문 원고를 밤새 쓰고 난 다음 날 아침 책상 위를 보면, 차마 눈뜨고는 볼 수없을 정도의 가관이 벌어져 있곤 했다. 아니 솔직히 고백하면, 거의 항상, 그랬다. 손톱깎이, 수북이 쌓여있는 비스킷 봉지, 그리고 아예 통째로 가져다둔 땅콩버터….
그 기름기 많은 것을 언제 그리 파먹었는지 먹은 분량이 거의 치사량(?)에 달할 때는 정말이지 삶이 원망스럽고 기가 막혔다.
그래도 이미 먹은거 어떻게 하겠나, 다음부터 땅콩버터만은 절대로 먹지 말아야지, 라며 스스로의 죄책감에 면죄부를 써주기도 하지만, 그래도 이미 상해버린 마음과 높아진 칼로리는 회복할 도리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그렇게 밤새 써 놓은 내용중에 건질만한 문장을 단 하나도 발견할 수 없을 때, 그럴 때는 정말이지 이걸 왜 쓴다고 했나, 다시는 원고 청탁하는 분들과 연을 맺지 말아야지, 내가 원고 청탁을 또 수락하면 인간이 아니다, 별별 소란스런 마음과 회한이 순식간에 가득해 지곤 했다.
개인적으로 원고가 잘 안써질 때 사용하는 처방이 있는데 손톱을 깎거나, 과자를 먹는 것이다. 그렇게 머리를 좀 쉬고 나면, 거짓말같이 아이디어가 떠오르곤 했는데, 그 별난 습관이 어느새 삶안에 고착 되었나 보다.
그러나 그런 습관에도 유효기간이 있는건지, 한 2년 원고를 연재하다보니 그 신통한 습관도 믿을 것이 못되었다. 아무리 슈퍼에 가서 새로 나온 과자들을 종류별로 사다놓고 먹어 봐도, 아이디어가 없을 때는 끝까지 없는 것으로 일관되었다. 정말 원망스럽고 달갑지 않은 일관성이었다.
그렇게 애를 쓰던 즈음, 더 기가 막힌 전화를 받았다. 조금만이라도 원고를 더 써달라는 편집국의 요청이었다. 나 스스로도 힘들었지만, 그런 글을 읽어야 할 독자들께 너무 죄송하다는 생각을 진작부터 해왔던 터라, 단번에 거절하였다. 그러나 말에 설득력이 없었던 것인지, 유명무실한 거절이 되어버렸다.
결국은 또 이렇게 원고를 쓰고 있으니 말이다. 적어도 올 한해 동안은 독자들과의 만남이 이렇게 계속될 것 같다.
친구 수녀님에게 이 심각한 상황을 얘기 했더니, 『질긴 인연이네, 잘 해봐』, 그러는 것이었다. 격려를 해주는 건지 속을 더 긁어 놓는 건지….
꼭 그렇게 약을 올려놓고야 마는 그녀의 영리함과 깜찍한 우정이 또 한번 절망스러웠다. 친구라고 생각한 내가 바보지….
하여 좀 아름다운 이야기로 올 한해를 시작하기로 한다. 감히, 「하느님의 말씀」을 너무도 부족한 능력과 성의 없는 태도로 설명할 수밖에 없음이 송구스럽고, 별도움 안되는 글을 써서 독자들께 읽어보라고 들이미는 뻔뻔함이 죄송한 만큼, 함께 읽어갈 성서라도 아름다운 것을 선택하고 싶어서이다. 그렇게 심사숙고 하여 선정한 책은 「룻기」이다.
개관
전쟁 이야기와 투쟁, 배신, 죄에 대한 이야기가 난무하고 있는 구약성서에서, 룻기만큼 독보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책도 없을 것이다. 인물과 사건 중심의 자상한 보도가 쉬운 이해를 도와주며, 단순하면서도 수려한 문체는 히브리 문학의 우수성을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이야기 양식에는 선인과 악인이 공존하는데, 룻기에는 어찌된 일인지 선남선녀들만 등장한다. 그 어렵다고 정평이 나있는 고부(姑婦)관계조차도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관계로 표현되어 있다. 그녀들의 지극한 헌신과 사랑에 매료되어, 독서의 즐거움이 배가되는, 그런 책이다.
성서에서의 위치
히브리 경전 목록에서 성문서에 속하는 룻기는, 그 중에서도 「다섯 개의 축제 두루마리」라고 불리는 메길롯의 첫번째에 등장한다. 그러나 칠십인역에서는 이 책을 「역사서」 부분에 편입시키고 있다.
신명기계 역사서로 간주되는 판관기 바로 다음에 배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칠십인역의 이러한 결정은 아마도 이 책의 시대적 배경과 연결되어 있는 듯 하다. 그 역사적 배경이 판관시대로 설정되어 있어서(룻기 1, 1 참조) 연대기적 의도에 따라 판관기 다음에 이 책을 두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룻기가 「메길롯」에 속한다는 사실은 이 책이 이스라엘 중요 절기에 낭독되던 책임을 제시한다. 이 책은 원래, 「오순절」에 낭독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오순절은 봄에 곡물을 추수한 후, 이를 감사하기 위해 드리던 일종의 농경축제였다.
그러나 서기 70년, 로마인들에 의해 경작할 수 있는 땅을 완전히 상실하게 된 유다인들은 더 이상 농사를 지을 수 없었고, 오순절이 되면 룻기를 읽는 것으로 그 마음을 대신했던 것이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