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기리시탄 시대
1. 하비에르의 일본 포교
1549년 8월 15일 하비에르 일본 도착
일본은 1549년에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였다. 이후 기리시탄(切支丹) 전성기, 박해와 순교의 시대를 거치면서 1643년 일본 내의 마지막 신부가 순교함으로써 교회와 교계제도가 무너졌다. 이후 신자들은 도쿠가와 막부(德川 幕府)의 신자 말살 정책으로 약 250년간을 숨어서 대대로 신앙을 지켜왔다. 이때를 잠복 기리시탄(潛伏 切支丹) 시대라고 한다. 1865년 오우라(大浦) 천주당에 이 잠복 기리시탄이 나타났다. 일본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잠복 기리시탄의 부활을 맞이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곧이어 명치정권의 기리시탄 박해가 시작되어 1873년 금교령이 철폐될 때까지, 순교자가 흘린 피와 순교정신은 오늘날 「일본 역사의 빛」으로 영원히 빛나고 있다.
이 일본 기리시탄 박해사에 조선인 순교자들과 그들의 신앙생활이 두드러지고 있다. 이들은 1592~1597년, 일본의 조선 침략 때 포로가 되어 일본에 끌려온 조선인들이었다. 이국땅에서 조국과 부모 형제를 잃은 슬픔과 자신의 포로와 노예 생활에서도, 신앙을 얻은 행복과 순교의 열망으로 자신을 승화시켜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영광스럽게 살아간 자들로 현대국제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깊은 감명과 빛이 되고 있다.
1542년부터 인도에서 포교를 하고 있던 동양의 사도, 예수회 신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Francisco de Xavier 1506~1552)는 일본인 안지로(安次郞)를 만나 일본 포교를 결심하고, 1549년 8월15일 성모승천 대축일에 규슈(九州)의 가고시마(鹿兒島)에 도착하였다.
당시 규슈의 다이묘(大名=영주)들은 포르투갈 상선의 내항(來航)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사쯔마의 영주 시마츠 다카히사(島津 貴久)는 하비에르 신부 일행을 대단히 환대하였고, 신부는 영주로부터 포교허가를 받았다.
하비에르 신부는 영주의 모친에게 성모상 그림을 선물하였는데 이후 성모신심은 일본 기리시탄의 제일가는 신심으로 자리잡았다. 잠복시대에는 관음 마리아로 그들에게 신앙을 지켜나갈 수 있는 힘이 되었고, 1865년 기리시탄 부활을 이끌어 낸 것도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의 결과였다.
하비에르 신부는 주민의 신앙 중심지인 복창사(福昌寺)을 방문하여 주지와 친교를 맺고 복창사 문전에서 포교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포르투갈 선의 무역에 의한 이익을 계산하고 있던 영주는 무역선이 히라도에 내항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하비에르 신부에 대한 태도가 일변할 수밖에 없었다.
신부는 국왕으로부터 전국적인 포교허가를 얻어 보다 효과적인 선교를 펼치기 위해 1550년 8월말에 안지로에게 뒷일을 맡기고 가고시마를 떠났다.
박양자 수녀(한국순교복자수녀회·오륜대 한국순교자기념관 학예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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