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상무역 이익위해
기리시탄 포교 허락
1. 하비에르의 일본 포교
2) 하비에르 신부의 선교 발자취
하비에르 신부의 상경여행은 히라도(平戶)-하카다(博多)-야마구치(山口)-미야코(都)-히라도-야마구치-붕고(豊後)에서 인도로 간다.
당시 히라도(平戶)의 영주 마쯔라 다카노부(松浦 隆信)는 해상 무역에 힘을 쏟고 있던 터라, 하비에르 신부의 내방을 반기고 쾌히 포교허가를 해 주었다. 히라도에서 약 한달 머무는 동안 영주의 가신(家臣)중 기무라(木村) 집안 등 약 100여명이 세례를 받았다. 이 무렵부터 그리스도교와 그 신자를 포르투갈어의 「christao」을 일본어로 「기리시탄」이라고 말하기 시작하였다. 영주는 무역의 이익을 상실하지 않을 정도로 기리시탄을 보호할 방침이었다. 10월 말 히라도를 떠나 야마구치로 향했다.
그 후 히라도에서는 영주가 믿고 있는 선종(禪宗)을 비롯하여 진종(眞宗), 진언종(眞言宗) 등 불교 세력의 저항이 거세어지게 되고 가신들 중에는 신자를 박해하는 자가 있었다. 1559년 어느 날, 십자가의 길 기도를 하고 돌아온 하녀 마리아 센(仙)은 집 문전에서 무사인 주인에게 죽임을 당하여 일본 최초의 순교자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영주 다카노부(隆信)는 내심 포르투갈과 무역을 계속하기를 희망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리시탄에 대한 엄한 단속은 피하고 있었다.
야마구치의 영주
오오우치(大內) 씨의 선조는 백제왕의 계통(琳聖太子로 알려져 있음)으로, 스이고 천황(推古天皇 554~628) 시대에 일본의 야마구치(山口)로 건너와서 성(姓)을 오오우치(大內)로 개정하고, 점차로 세력을 확대하여 그 부강과 위세에 필적하는 자가 없었다. 미야코(都)풍의 궁정문화와 「오오우치 문화=大內文化」를 창출하여 서쪽의 미야코(西の都)로 불리고 있었다.
일본의 여러 영주들이 그렇듯이 야마구치의 영주와 귀족들도 교만과 사치 방탕의 생활에 만연해 있었다. 하비에르 신부는 교리를 설명하면서 「비도덕적인 생활과 우상숭배, 남색과 여색에 빠지는 자」를 질책하자 영주의 안색은 변하였다. 그러나 영주는 끝까지 조용히 들은 후, 신부 일행을 물러가게 하였다.
염원하던 미야코에로
엄동설한에 험한 산길을 걸어서 천신만고 끝에 미야코(都)까지 무사히 도착한 것은 1551년 1월 중순이었다. 미야코는 전국동란(戰國動亂)으로 황폐되어 있었고, 고나라(後奈良) 천황은 거처마저 위험에 처한 상태로 권위는 실추되었으며, 막부의 위신은 땅에 떨어졌다.
새 전투가 개시될 예정인 미야코를 본 하비에르 신부는 「가장 유력한 다이묘(大名)는 야마구치의 다이묘」임을 확인하였다. 오오우치 요시타카(大內 義隆)를 재 방문하기로 하고 하느님의 새로운 계획을 기대하면서, 꿈에도 그리던 일본포교의 최고 숙원인 일본 왕 알현이 체재 11일 만에 물거품으로 사라지는 것을 느끼어 하비에르 신부는 시편114장을 낭독하며 감개에 빠졌다고 한다.
박양자 수녀(한국순교복자수녀회·오륜대 한국순교자기념관 학예연구원)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