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금교령 내려 교회시설 병원 몰수
노부나가가 본능사(本能寺)에서 변을 당한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7~1598)가 정권을 장악하고 오사카성(大坂城)에 입성했다. 히데요시 정권의 초기 기리시탄 정책은 대단히 호의적이었다. 히데요시의 부인 주변에는 5~6명의 기리시탄이 있었으며 그 중에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모친과 누이가 매우 신임을 받고 있었다. 다카야마 우콘(高山右近)의 진언으로 오르간티노(Organtino) 신부는 1583년 8월 오사카성을 방문하여 환대를 받고, 히데요시로부터 부지까지 받아 교회를 건축하여 미사도 봉헌하였다. 그리하여 교토, 오사카 교회는 긴키(近幾)지방의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 통일 정권을 꾀하며 규슈(九州)를 평정하고 1587년 6월 하카다(博多) 진영에 돌아오자 기리시탄에 대한 그의 태도는 일변하였다. 6월 19일 맑은 하늘의 날벼락과도 같이 「기리시탄 금교령」 5개 조항을 발령했다. 일반적으로 빠테렌(선교사) 추방령이라고도 한다. 그 요지를 간략히 소개하면,
(1)일본은 신국(神國)으로 사법(邪法)은 용서할 수 없다.
(2)사원, 신사의 파괴는 전대미문의 일이고 각 영주는 천하의 법도를 준수해야한다.
(3)선교사는 불법(佛法)의 파괴자이므로 20일 이내에 일본으로부터 퇴거해야 한다.
(4)상선(商船)은 도항해서 매매를 해도 좋다.
(5)불법(佛法)을 방해하지 않는 자는 도래(渡來)해도 좋다.
하비에르 신부의 전도로부터 순조롭게 발전하고 있던 일본 그리스도교계는 심각한 충격을 받았다. 이 금제는 교토, 오사카 등 긴키 지방과 나가사키 지방에서 실시되어 난반지(南蠻寺=기리시탄 사원)를 비롯하여 각 교회는 거의 파괴되었고 수도원과 병원, 신학교 등은 몰수되고, 나가사키 교회령은 히데요시의 직할령으로 되었다. 1588년에는 나가사키 다이칸(代官=막부관할의 지방관)을 기용하여 그 지배 하에 두고 포르투갈 무역선과 기리시탄 영주를 감시하게 하였다. 한편 일본 퇴거를 통고 받은 예수회 회원들은 사태를 주시하고 일부 회원을 마닐라로 보내고, 남은 자는 기리시탄 영주 영내에 잠복하였다.
장군 히데요시는 금교령 반포 후 얼마 후부터는 기리시탄 묵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전국 통일의 위세와 1591년 가을에는 조선정벌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1594년 마닐라로부터 파견된 프란치스코회 선교사 베드로 바우티스타(P. Bautista)는 히데요시 와의 외교 교섭에 성공하여 교토를 중심으로 프란치스코 관구를 설치하고 교회와 수도원을 건립하여 공공연하게 미사와 전도를 하고 있었다. 이렇듯 교회는 차차 정상을 찾아 가는 듯 보였으나, 예수회 선교사는 「장군 히데요시의 감정이 언제 폭발할까」 우려하며 살얼음 위를 걷고 있었다.
박양자 수녀(한국순교복자수녀회·오륜대 한국순교자기념관 학예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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