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의 용서’ 제도적 보장
예수님 몸소 용서의 삶 살며
업보와 상선벌악 사상 청산
고해성사에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요체인 복음(Good News)이 배어있다. 복음은 동서고금의 어느 종교에도 없는 죄에 대한 완전한 해법을 제시한다. 그리고 고해성사는 신자들에게 그 복음, 곧 죄의 용서를 제도적으로 보장해주는 장치이다. 과연 어떻게 해서 그러한지를 하나 하나 짚어보기로 한다.
죄의 대가(代價)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 죄를 없앨 방법은 없는가? 이에 대하여 세상의 모든 종교들은 죄의 대가는 치러야 된다고 가르쳐 왔다.
먼저, 힌두교와 불교에서는 업보(業報)사상을 신봉하고 있다. 업(業, Karma)이란 중생이 짓는 선악의 소행을 말하며, 그것이 선업이냐 악업이냐에 따라서 응보(應報)의 대가가 있다는 것이다. 곧 환(幻, Maya)에 지나지 않는 감각적인 세상의 속박 안에서 살면서 행위와 말과 뜻으로 업인(業因)을 쌓고 그에 대한 응보로서 영원한 윤회(輪廻)의 수레바퀴 속을 돌아야 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라는 것이다. 불교는 이 「업」이 우주를 지배하고 있다고 말한다. 결국, 인간은 윤회의 굴레 안에서 악업과 선업에 대한 책임을 질 수밖에 없고, 죄 많은 인간은 그 질곡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유다교의 신앙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구약성서의 상선벌악(償善罰惡)에 대한 믿음이 업보사상과 비슷했다. 악인은 벌을 받을 것이며 의인은 분명히 보상을 받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악인들은 그들의 그릇된 생각 때문에 벌을 받을 것이다. 의인을 무시하고 주님을 배반하였기 때문이다』(지혜 3, 10).
『의인들은 영원히 산다. 주님이 친히 그들에게 보상을 주시며 지극히 높으신 분이 그들을 돌봐 주신다』(지혜 5, 15).
이러한 믿음이 구약성서의 믿음이었으며 이후 유다교의 믿음이 되었다. 그리고 사실 이는 세계의 모든 종교가 믿고 있는 바이기도 하다. 동서(東西)를 막론하고 죄인에게는 응분의 벌이 기다리고 있으며 죄인에게 미래는 곧 심판의 때요 좌절의 때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기성종교들의 신념이었던 것이다.
인간의 비극은 죄를 없앨 방도가 없다는 데에 있었다. 역사 이래 어느 누구도 사람의 죄문제를 해결해 준 이가 없었다. 의사가 수술을 해서 제거할 수도 없었다. 심리 치료사가 상담이나 약물로 없애버릴 수도 없었다. 그 까닭에 예레미야 예언자는 말했다.
『에티오피아 사람들이 제 피부색을 바꿀 수 있겠느냐? 표범이 제 가죽에 박힌 점을 없앨 수 있겠느냐? 그렇다면 악에 젖은 너희도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으리라』(예레 13, 23).
요즈음 「마음수련」이라는 사이비 영성 방법이 스스로 죄를 씻어낼 수 있다고 가르치는데 그것은 돈벌이를 목적으로 한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 죄를 용서하는 최종적인 권한은 하느님께만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쁜 소식이 있다!
저렇듯이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었다. 바로 이 문제를 청산해 주시려고 오신 분이 예수님이셨다. 예수님이 첫 번째로 선포하신 것은 복음, 곧 「기쁜 소식」이었다.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마르 1, 15).
무엇이 기쁜 소식이었을까? 「기쁜 소식」의 핵심적인 내용은 「죄의 용서」였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죄의 용서가 실현된 나라이다. 죄인들이 죄를 용서 받고 당당한 하느님 나라의 백성이 되어 왕이신 하느님의 은택을 누리는 나라인 것이다. 이런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명백하게 선언하셨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 17).
하지만 구약의 「상선벌악」사상에 익숙해 있던 유다교 지도자들의 귀에 이 말씀은 「큰일 날 소리」로 들렸을 터였고, 「죄인」들의 귀에는 이 말씀이 허황되게 「뜬 구름 잡는」 주장으로 들렸을 터였다. 사람들이 고개를 갸우뚱거렸을 것은 뻔한 일이었다.
이런 냉소와 회의 속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죄사함을 증거하기 위해 몸소 용서하시는 삶을 사셨다. 그 궤적을 우리는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겠다.
- 예수님은 죄의 용서를 선언하셨다. 어느 날 사람들이 지붕을 뚫고 데려온 중풍 병자에게 예수님은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 2, 5)고 선언하셨다.
- 예수님은 죄인들과 더불어 사셨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같이 음식을 나눈다』(마르 2, 16)고 공격을 받으실 만큼 그들을 당신 품으로 맞아들이셨다.
- 십자가에 달리셔서도 원수들을 용서하셨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사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루가 23, 34).
- 마지막 순간에 회개한 우도(右盜)에게도 용서를 선언하셨다.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루가 23, 43).
-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죽음을 통하여 이 용서를 완성하셨다. 예수님은 스스로가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요한 1, 29)이 되어 또한 스스로 『자비롭고 진실한 대사제로서』(히브 2, 17) 소나 양의 피가 아닌 자신의 피를 흘리며 영원한 「속죄의 제사」를 드리셨다(히브 9, 12).
지불된 용서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을 값으로 하여 용서를 완성하셨다. 이로써 불교에서 말하는 「업보」의 숙명도 유다교에서 말하는 「상선벌악」의 굴레도 말끔히 청산되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세상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응보의 원칙을 따라 복수와 징벌을 가하고자 한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값을 치르고 이 법칙을 「용서의 법칙」으로 바꾸어 놓으셨다.
베드로 서간은 이 사실을 이렇게 표현한다.
『여러분은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헛된 생활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그것은 은이나 금 따위의 없어질 물건으로 값을 치르고 된 일이 아니라 흠도 티도 없는 어린 양의 피 같은 그리스도의 귀한 피로 얻은 것입니다』(1베드 1, 18~19).
이처럼 비싼 값을 치르고 얻어낸 용서를 지속적으로 보장해 주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특별히 제정하신 것이 고해성사이다. 고해성사를 통해서 우리는 단순히 「사죄경」만을 듣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대신 피흘리시고 돌아가신 예수님의 희생적 사랑을 만난다. 손수 죄인들을 찾아가셔서 죄를 용서해 주시고 함께 어울리면서 위로해 주셨던 예수님의 그 가없는 연민을 만난다.
차동엽 신부(미래사목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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