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폐화된 영혼의 상처 치유
하느님 뜻 거스르는 것이 죄
사순절에 속죄하고 보속해야
용서를 위하여
키에르케고르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용서를 위하여」라고 단언한다.
『죄인에 대한 문제라면 하느님은 그냥 팔을 벌리고 서서 「이리 오라」고 단지 말씀만 하시지 않는다. 줄곧 서서 기다리신다. 탕자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아니다. 그분은 서서 기다리시지 않는다. 찾아 나서신다. 마치 목자가 잃은 양을, 여인이 잃어버린 동전을 찾아 나선 것처럼 그분은 찾아 가신다. 아니다. 그분은 이미 가셨다. 그 어떤 목자나 여인보다 무한히 먼 길을, 진정 그분은 하느님 신분에서 인간 신분이 되기까지 무한히 먼 길을 내려오셨다. 그렇게 죄인들을 찾아오신 것이다』
은총의 절기 사순절이 되면 우리는 특히 이 예수님을 만나고자 한다. 죄의 용서를 위하여 「그 어떤 목자나 여인보다 무한이 먼 길을」 오신 바로 그 예수님 품에 안겨 그동안의 삶을 속죄하고 보속하고자 하는 것이다.
고해소에서 겪는 당황
용서는 인간의 셈법을 초월하는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곧잘 당황하게 된다. 자신이 고백한 죄의 심각함이나 무게에 비할 때 고해 신부가 주는 보속이 너무 헐하다는 생각이 들 때 그렇다. 「첫 고백」이라는 시에서 정희성 시인은 이 당황스러움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오십 평생 살아오는 동안 / 삼십 년이 넘게 군사독재 속에 지내오면서 /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증오하다 보니 / 사람 꼴도 말이 아니고 / 이제는 내 자신도 미워져서 / 무엇보다 그것이 괴로워 견딜 수 없다고 / 신부님 앞에 가서 고백을 했더니 / 신부님이 집에 가서 주기도문 열 번을 외우라고 했다 / 그래서 나는 어린애 같은 마음이 되어 / 그냥 그대로 했다』(정희성, 「2000년 한국가톨릭시선」에서).
겪어본 이라면 시인이 느끼는 괴리감을 이해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이다. 엄청난 세월 동안 쌓아 두었을 분노와 욕설이 몇 백 근은 너끈히 될 터인데 사제는 대수롭지 않게 들었을 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래서 고작 주기도문 열 번의 보속을 주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실제로 고해소의 은총이다. 죄와 보속의 불균형, 이것이 고해소의 모순이며 정의(正義)이다. 그래서 시인은 그 엄청난 죄에 고작 「주기도문 열 번」이라는 보속(補贖)을 어린애 마음이 되어 「그냥 그대로」 행했을 것이다.
비슷한 체험을 시인 장정애가 「고해소를 나오며」라는 시로 전해 주고 있다.
『참 알 수 없는 당신의 저울 / 그 한 가슴의 사랑과 / 수많은 유다를 / 한몫에 매기시더니 / 오늘 / 송곳 같은 나의 죄와 / 성모송 한 번을 / 같은 추에 두시다니』(장정애, 「2000년 한국가톨릭시선」에서)
이 시인 역시 고해성사의 무량한 은총을 짤막한 문장으로 담아냈다. 그 의아심과 벅찬 감격을 그려낸 것이다.
고해의 은총을 가리는 유혹
이렇게 과분한 것이 고해성사의 은총이다. 그런데 우리로 하여금 이 고해성사를 기피하도록 만드는 유혹이 있다.「죄는 없다」는 유혹이다. 앤드류 마리아가 쓴 「지혜의 발자취」에 나오는 한 토막 이야기는 우리에게 의미심장한 가르침을 전해준다.
어느 날 사탄은 지옥 회의를 소집해서 악마들에게 연간 보고를 하도록 요구하며 공(功)이 가장 큰 악마에게 상을 내리겠다고 했다.
악마 1호가 일어나 말했다. 『사탄 마왕님, 저는 수많은 인간들을 육욕의 죄에 빠뜨렸습니다. 그랬더니 그 녀석들 타락하고 말았지요』
악마 2호가 일어나 말했다. 『저는 수많은 인간들을 오만의 죄에 빠뜨렸습니다. 그랬더니 그 녀석들 생명을 잃고 말았지요』
악마 3호가 일어나 말했다. 『저는 수많은 인간들을 탐욕의 죄에 빠뜨렸습니다. 그랬더니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더 많은 고통을 겪더군요』
마지막으로 악마 4호가 일어나 말했다. 『저는 수많은 사람들을 죄 같은 것은 아예 없다고 믿게 만들었습니다』
이에 사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참 잘했다. 악마들에겐 그것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업적이니라. 인간들에게 죄 같은 건 아예 없다고 믿게 만드는 것 말이다』
실제로 요즈음 신흥영성(=뉴에이지)운동들은 죄 자체를 부인(否認)하는 가치관을 유행시키고 있다. 이들은 기성종교가 사람을 구원하지 않고 오히려 사람에게 죄의식만 조장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본래 선(善)도 없고 악(惡)도 없고 따라서 죄(罪)도 없는데, 종교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놨다는 것이다. 그래야 종교인들이 먹고 살 수 있으니까 그렇게 만들어놨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들은 그러지 않아도 도덕이나 계명 같은 것들을 부담스럽게 여기고 이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충동 가운데 있던 포스트모던 세대들에게서 크게 호응을 얻고 있다.
과연 죄는 없는 것일까? 이를 밝히려면 먼저「죄」라는 말의 뜻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성서적인 의미로 죄(특히 히브리어 hata와 그리스어 hamartia)는 어떤 기준인 하느님(의 계명)을 벗어난 행위를 말한다. 그러니까 죄의 성립에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척도가 되는 하느님의 존재여부이다. 하느님이 존재한다면 죄라는 것도 있는 것이다. 절대자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 바로 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느님은 존재하신다(여기서는 존재여부를 입증할 게제가 아니다). 절대자 하느님이 존재하는 한 『죄는 없다』고 하는 주장은 기만이다. 이 기만은 인간의 영혼을 황폐화시킨다. 그 상처를 치유시켜 주는 것이 고해성사다.
아름다운 고해
고해를 봉헌(奉獻)의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법을 가르쳐 주는 성찬경 시인의 「봉헌」이라는 시를 소개한다.
『오오, 하느님 / 당신 앞에서 무릎꿇고 당신 이름 부르며 / 당신께 저의 모든 것을 바칩니다. / 비밀 속에 숨은 비밀까지도 / 환히 보시는 당신 앞에서 / 제가 숨길 수 있는 것이 뭣이 있겠습니까. / 다만 죄로 얼룩진 저의 영혼의 지도를 / 당신 앞에 펼치겠습니다. / 오오, 하느님. / 원래는 하늘에 계신 당신처럼 / 완벽에로 나아가야 할 제가, / <성체> 모시는 하느님의 성전이어야 할 제가, / 이렇게 딱한 꼴이 되었습니다. / 이것이 저의 검은 사욕입니다. / 이것이 잘못 사용한 / 저의 자유의 구김살입니다. / 이것이 게으름에서 고인 저의 번뇌, / 아픔, 괴로움, 저의 우수입니다.
그러나, 오오, 하느님 / 제게 마지막 남은 비밀이 있습니다. / 그것은 끝으로 남은 / 한 조각 맑고 가난한 마음으로 / 당신을 찬미하고자 하는 / 저의 바람입니다. / 이렇게 밖엔 할 수 없는 /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어 / 빛에로, / 평화에로 이끌어주소서.
오오, 영원히 찬미하올 하느님. / 이 죄인을 당신 곁에 이끌어주소서』(성찬경, 「황홀한 초록빛」에서)
고해가 이런 것이라면 고해는 아름다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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