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몸으로 가난한 이를 사랑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 창립
열악한 환경속에서 가난영성 깨달아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지만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이 우리 눈앞에서 흘리는 땀과 희생 덕분에 가능한 것이다』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와 「선교 사제회」 창설자인 빈첸시오 아 바오로(1581∼1660)는 「가난한 사람들은 우리의 주님」이라는 말을 그대로 삶속에 옮기면서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사람 안에서, 특히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의 실천으로 드러남을 온몸으로 설파한 인물이다.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는 1581년 4월 24일 프랑스 남서부 랑드 지방에 있는 닥스시 근처 프루이(Prouy)에서 가난한 농가의 6남매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의 16세기 후반 프랑스는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도 매우 혼란한 시기였다. 1562년부터 1598년 사이에 벌어진 8차례의 종교 전쟁은 많은 것을 파괴하고 경제를 도탄에 빠뜨렸으며 세금은 천정부지로 높아 대부분 국민들의 삶은 비참함 그대로 였다. 거지들은 들끓고 많은 농부들은 가난해져 가는 상황이었지만 세금 착취로 귀족들은 계속 부귀 영화를 누리고 있었고 그런 만큼 빈부 격차는 극심하게 벌어졌다.
한편 교회는 부유한 사람들 편에서 부유함과 영향력을 보이던 시절이었다. 개혁을 위한 트리엔트 공의회 결정 등은 거의 실현되지 못했고 특히 사제들을 위한 교육이 빈약했다. 많은 이들이 실망하고 교회에 신뢰심을 갖지 못했으나 그에 반하여 보다 하느님께 충실하려는 종교적 운동들이 생겨나기도 했고 이것은 화려한 성당들이 많이 지어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빈첸시오 아 바오로의 삶은 이같은 시대적 배경에 대해 보다 큰 이해를 전제로 한다. 넉넉치 않았던 가정, 또 살았던 지역조차 빈곤하고 척박한 곳에서 태어난 빈첸시오는 살림살이 뿐 아니라 지역 주민 절반 이상이 글을 읽거나 쓸줄 모르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농부들의 삶과 가난을 알게 됐고 그 경험은 향후 삶 전체에 대단히 큰 척도가 됐다.
14세가 되었을 때 인근 닥스(Dax)의 프란치스코 회원들에게서 학업을 시작했던 빈첸시오는 2년후 툴루즈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다음해 투르브 주교좌성당에서 부제품을 받고 20살이 되던 1600년 사제품을 받았다.
이후 교육자, 자선 사업소, 관리인, 본당 신부 등 일을 거치며 사목자로서 사회내 다양한 계층을 만나게 됐고 귀족들의 화려함과 동시에 가난한 이들의 비참과 곤궁을 목격했던 그는 1610년경 프랑스에 오라토리오회를 설립 하러온 삐에르 드 베륄 신부를 만나게 됐고 그로부터 공디 백작의 전속 사제겸 가정 교사일을 제안받았다.
공디 백작 부인의 교사일과 함께 백작집의 하인 소작인들을 돌보는 일을 맡았던 빈첸시오는 이때 다시금 시골 사람들의 영적 물질적 빈곤을 목격하게 됐다.
베륄 신부 허락으로 그 집을 떠난 빈첸시오는 당시 빈민 지역이었던 리용 근처 샤티옹 레 돔브 읍 본당신부로 부임했고 이곳에서 「애덕회」를 조직했다. 미사전 본당내 어려운 이들을 소개하고 신자들이 그 집을 돌볼 것을 요청했던 빈첸시오는 또 신자들이 봉사하는 마음을 갖도록 하기 위해 규칙을 작성했는데 이것이 곧 애덕회였다.
얼마후 공디 백작의 간곡한 청에 따라 자유로운 선교 활동을 조건으로 다시금 공디 백작 집에 입주하게된 빈첸시오는 1625년까지 공디 가문의 전속 사제로 생활하며 여러 마을에서 설교 활동을 벌이는 한편 애덕회를 창설했다. 또 공디 백작이 관리 책임을 맡은 갤리선 죄수들의 비인간적 대우를 개선토록 요청, 갤리선 구호 관리관 직책을 받기도 했다.
공디 가문에 머무는 동안 노예들의 생활이 나아지도록 최선을 다했으며 그들을 위한 병원까지 설립하고 영적으로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공디 백작 부인이 사망한 후 빈첸시오는 가난한 이들 특히 시골 사람들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이들의 복음화를 위해 「선교 사제회」를 창립하기도 했다.
이 사제회는 당시 사용치 않고 있던 나자로 거리의 나환자 병원인 라자로의 집으로 이사한 후 「라자로회(Lazarists)」로 불렸다.
1625년말 빈첸시오는 미망인으로서 가난한 이들을 위해 열심히 봉사 생활을 하는 루이즈 드 마리악(Louise de Marillac, 1581∼1660)을 알게 된다. 빈첸시오는 지도 신부가 되어달라는 루이즈의 청을 받아들였고 시골 지역의 애덕회 관리를 그녀에게 맡기게 된다. 성직자들을 위한 모임 「화요회」를 결성하기도 했다.
30년 전쟁으로 어려움에 처한 파리 주민들과 시골 주민들의 구호 사업에도 헌신한 빈첸시오는 루이즈 친구들의 협조가 늘어나면서 「애덕 부인회」를 설립, 이들이 병원을 찾아 중병에 걸린 환자들과 고아들을 돌볼 수 있는 조직을 마련했다.
그러나 한편 귀족과 평민의 신분이 엄격했던 배경에서 상류층 부인들이 중환자를 가까이 하는게 쉽지 않았고 가난한 이들도 그들의 시중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이런 배경에서 수녀회 창립을 결심한 빈첸시오는 루이즈에게 신심 깊은 처녀들을 찾도록 부탁했고 마침내 봉쇄수녀회와는 다른 수녀회를 창설했다. 바로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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