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 안에서 하느님과 일치
병자·빈자 있는 곳이 곧 수도원
자기 중심 떠나 복음실천 강조
빈첸시오 아 바오로가 창립한 선교 사제회 라자로회와 애덕의 수녀회, 즉 현재의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는 당시 교회 상황을 감안할 때 매우 파격적인 형태였다.
라자로회는 도시에 비해 사목적으로 열악한 처지에 있는 농촌 신자들을 찾아 교육을 시키고 성사를 집행했으며 성직자들의 재교육이 부족한 처지를 인식하고 사제 교육에도 노력을 쏟았다.
이같은 노력을 통해 빈첸시오는 아무리 신학적 지식이 많더라도 헌신적인 생활과 기도 생활을 하지 않을 때 성직자들의 복음화 노력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인식시키며 사제들의 생활 쇄신에 기여했다.
특히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 출현은 여성 수도자들이 수녀원 담밖을 넘어 활동을 펼치는 새로운 모습을 가져왔다.
당시에는 사회복지 활동을 하는 수도회 보다 관상 생활을 하거나 혹은 학교를 운영하는 수도회들이 대부분이었는데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는 병자들과 가난한 이들이 있는 곳을 수도원으로 삼았다. 즉 수도자의 정신으로 살아가지만 수도복 수도원에 틀을 두기 보다 「이웃 사랑 실천」이라는 본질적인 업무에 몰두했다.
빈첸시오는 수도자들에게 『여러분에게 수녀원으로는 병자들의 집과 장상이 있는 집이 있고 여러분의 보호 지역으로는 도시의 길이 있고 봉쇄로는 순종이 있으며 서원으로는 하느님 섭리에 대한 한결같은 신뢰심이 있습니다』고 강조했다.
사실 빈첸시오는 수녀들이 수도원 아닌 현장에서 사도직을 실천하는데 대해 적잖은 신중함을 기했다. 젊은이들이 과제로 삼고 있는 일을 수행하는데 수도원의 담이 방해가 될 수 있음도, 또 교회 장상이 봉쇄 구역을 가지지 않은 수녀회에 선입견을 극복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을 감지하면서 프란치스코 드 살이 봉쇄 구역을 가지지 않고 사회 봉사에 전념하는 수녀회를 창설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던 경험도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면에서 빈첸시오는 수도회 회원들이 수도복을 입는다든가 서로를 수녀라고 부르는 것을 삼가토록 했다.
그들에게는 병원이 곧 수도원이었고 수도원 성당은 인근 본당이었고 주변 지역의 길들은 수도원 정원이었다.
또 순종이 수도원의 담이기도 했다. 이들의 과제는 오로지 병자들을 돌보는 것이었기에 병자들이 있는 곳이 곧 수도원이요 소임 장소였다.
수도회 관계자들은 『거룩한 겸손이 순결을 지켜주었고 이들의 소명을 지켜준 것은 다른 서원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 섭리에 대한 믿음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 수도회는 1668년 로마로부터 인가를 받았는데 그후 상황에 따라 차츰 수도복과 봉쇄 구역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나자로회 및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 창립 등을 통해 빈첸시오 아 바오로가 세상에 남긴 것은 「주님을 따르는 삶」을 보여준 것이었다. 그리고 이 삶을 사는데 있어 항상 하느님 뜻이 무엇인가 알려고 노력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서 자신들의 과제를 찾았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학자들은 빈첸시오의 삶을 「훌륭한 활동가」로서 평가한다. 미리 계획을 세워 그에 맞춰가기 보다는 그때 그때 현실적 상황안에서 시대적 필요성과 그에 대한 적절한 부응책을 즉시 파악할 줄 알았다는 것이다. 또 그는 조직력을 지녔으면서도 제도 보다는 사람을 중시한 인물이었다.
그의 영성은 「활동 안에서 하느님과의 일치에 이르는 길」로 요약된다.
진정한 신앙은 복음생활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데 있으며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사람 안에서 특히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의 실천이라고 설파했다.
여기서 강조한 것은 실천에 있어 자기 중심을 떠나 여러 가지 집착을 버려야 한다는 것. 예를들어 어떤 자선 사업을 시도하려면 자신의 생각대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지시를 기다리며 활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처럼 빈첸시오는 어린이, 가난한 자, 병든 자, 갇힌 자 등 가장 가난한 이들 가운데 숨어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하는데 자신의 전 생애를 봉헌했다.
수도회 설립을 통해 육신적으로는 가난한 환자들에게 필요한 모든 조치를 베풀고 영신적으로는 그들이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봉사하는 것을 영성으로 삼고 모든 회원들이 「가난한 자들의 종」이 되기를 바랬다.
기도생활과 활동을 통해 하느님과의 일치에 이르는 애덕의 길을 모색했던 빈첸시오 아 바오로. 그의 정신은 이후 세계 모든 자선의 모범이 되었다.
실제로 1660년 그가 사망했을 때 이미 라자로회와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 수도회는 프랑스 밖을 넘어 세계 곳곳 많은 나라에 퍼져 나가 있었다.
1737년 6월 16일 교황 글레멘스 12세에 의해 시성됐던 빈첸시오는 1885년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모든 자선 사업의 수호 성인」으로 선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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