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역 외교 이용하려 처음에는 포교 허락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 이어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3~1616)가 에도(江戶=東京)에 막부(幕府=장군정치)를 열고 통일정권 확립과 중앙집권제로 정치와 종교 일치정책을 취하였다. 에도막부는 처음에는 기리시탄에 대하여 온화 정책을 펴서 선교사를 무역과 외교정책에 이용하였다. 그러나 마음대로 진행이 잘 되지 않자 불승과 반 기리시탄 측근들의 책동 그리고 일본의 신불신앙과 자신의 신격화에 방해가 되는 유일신 그리스도교를 사교 및 이단으로 단죄하고 유례없는 역사적인 탄압을 개시하였다. 기리시탄 말살정책과 더불어 쇄국정책으로 막부하의 기리시탄들은 약 260여 년간 박해와 순교, 탄압을 계속 받게 되었다.
이러한 박해사 가운데 조선인 순교자들은 포로와 노예의 온갖 서러움과 무시천대를 받으며 세상의 악과 고통 속에 있었다. 그러나 마치 「종의 신분을 취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자」 되어 자기가 처한 자리에 굴하지 않고 하느님의 새로운 생명에로 건너갔다. 「이들이 세상을 이긴 자들이다」.
이 장에서는 박해사의 흐름에 따라가면서 주로 조선인 순교자들을 중심으로 기려본다.
1) 기리시탄의 에도 전래
하비에르 신부가 1549년 일본에 그리스도교를 전래한 후, 규슈와 긴키 지방에서는 기리시탄 황금기를 이루고 있었지만 에도 지방에는 박해를 피해 흘러들어온 소수의 기리시탄이 있었을 뿐이었다. 1590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 성에 입성하고, 1598년에 히데요시가 병사하자, 이에야스가 천하의 세력을 잡게 되었다. 이에 에도의 포교를 중시하고 힘을 기울인 것은 프란치스코회의 예로니모 예수(Jeronimo.J) 신부였다.
예로니모 신부가 이에야스 장군을 알현한 자리에서 장군은 관동지방에 외국 상선의 도항과 은광채굴 기술지도 등을 의뢰하고, 신부는 에도 포교와 거주 및 성당 건립의 허가를 받았다. 그리하여 현재 니혼바시(日本橋) 근처에 로자리오 성모성당을 건립하였다. 1600년 동군과 서군의 전투에서 승리한 이에야스는 통일정권의 기반을 굳히기 위하여 무역에 힘을 쏟고 있었지만, 예로니모 신부의 병사로 무역은 오리무중에 빠졌다. 한편 같은 해에 붕고(豊後=大分)에 상륙한 오란다(네델란드) 상선 선장 윌리암 아담스가 이에야스의 초대를 받고 외교고문이 되어 에도에 살게 되었다. 이후 포르투갈과 오란다의 무역싸움이 종교 간의 알력으로도 되었고 막부의 박해에 힘을 실어 주기도 하였다.
1603년 소텔로 신부가 에도 관구 장으로서 본격적인 포교활동을 시작하여 아사쿠사(淺草)에 교회와 병원, 나병환자 수용소를 개설하였다. 에도 성에서는 도쿠가와 히데타다 가 장군직을 물려받아 도쿠가와 가(家)의 에도막부 정권의 세습화가 시작됐다. 한편 예수회는 포교장 프란치스코 빠시오와 베드로 모레혼 신부가 슨뿌(駿府=靜岡)성에서 은퇴정무를 보고 있던 이에야스를 알현하여 포교허가를 받았다. 이리하여 관동지역에서도 기리시탄 융성기를 맞이한 듯 하였다.
박양자 수녀(한국순교복자수녀회.오륜대 한국순교자기념관 학예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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