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솔직히 내가 이 세상에서 무엇을 제일 무서워하는지를 잘 몰랐었다. 남들이 심장 떨려 못 본다는 호러 영화도 잘보고, 짐승의 피로 만들었다는 순대와 선짓국도 잘 먹으니, 무서운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얼마 전 우연히 그 답을 찾게 되었다. 부모님 중 한분이 돌아가시는 꿈을 꾼 다음이었다. 내게는 「가족의 죽음」이 가장 큰 공포였다. 걱정이 되어 바로 전화를 드렸더니 어머니는 「아버지와 당신 모두 죽을 기미가 없는게 문제」라고 하셔서 또 한번 딸의 잔소리를 들으셔야 했다. 이상한 일이다. 남들 앞에서는 늘 기죽어 사는 편인 내가, 꼭 부모님께만은 큰소리를 치고 그분들의 속을 뒤집어 놓고야 만다. 부모님께 대한 태도를 반성해 보면, 반항을 일삼던 사춘기 때보다 나아진게 없다는 생각이다.
애가 2장에는, 어미(예루살렘)의 품에 안겨 배가 고프다고 칭얼대며 죽어가는 아이들의 비극이 묘사되어 있다. 뉴스나 신문에서 자주 보아온 모습이지만, 사실 품 안에서 죽는 혈육의 죽음보다 더 한 공포는, 이 세상에 없는 듯 하다.
2장
2장의 핵심적 주제는 첫 시작(1절)과 마지막(22절)에 잘 제시되어 있는데,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날, 곧 「주님의 진노의 날」에 대한 것이다. 2장 역시 알파벳 순서로 엮어져 있고, 크게 두 부분으로 구별된다. 전반부(1∼10절)는 예루살렘 파괴의 참상을, 후반부(11∼22절)는 예루살렘을 치신 「아버지 하느님」과 「그분의 딸 예루살렘」의 가슴 아픈 대화가 제시된다.
2, 1∼10
이 부분에서 하느님은 마치 기습적으로 습격하여 모든 것을 도살하시고 파괴하시는 약탈자의 모습으로 등장하신다. 쳐부수시고, 허물어버리시며, 쓰러뜨리시고, 불 지르시는 모습이 연속적으로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의 성문들은 무너지고(9절), 성벽이 허물어졌으며(7∼8절), 궁궐을 비롯한 모든 건물들이 파괴되었다(2, 5절). 심지어 하느님은 당신의 성전(4절), 초막(6절), 제단과 성소(7절)까지 무너뜨리셨다. 예루살렘의 참상은 시각적으로만 제시되지 않고 청각적으로도 표현된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곡성과 아우성 속에 오직 한 군데서만 축제의 노랫소리가 들려오는데, 그것은 적들이 부르는 축제의 함성이었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7절). 9∼10절에서는 유다의 최고 지도자들의 말로가 제시된다. 임금과 고관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피난을 가고(9절), 유다의 정신적 리더들인 사제들, 예언자들, 원로들은 하느님으로부터 그 어떤 지혜도 받을 수 없어 그저 답답한 심정으로 조용히 애도를 올릴 뿐이다.
2,11∼22
11∼12절에서는 전쟁의 참상 중, 우리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는 장면이 묘사된다.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들이 도시의 광장과 길가에 쓰러져 배고픔으로 죽어가는 모습이다. 어미에게 먹을 것을 요청하지만 어미 역시 죽어가고 있어, 그저 체념하고 자식의 죽음을 지켜볼 뿐이다. 13절에서는 예루살렘의 비극이야말로 그 어떤 것과도 비할 수 없는 처절한 고통임이 3번이나 연속적으로 제시된 수사학적 질문들을 통해 강조된다. 14절은 예루살렘의 멸망이 유다의 정치적 지도자들의 죄와 무관하지 않음을 고발하는데 그 때문에 『아름다움의 극치요 온 누리의 기쁨』(15절)이라고 숭앙을 받던 「처녀 예루살렘」은 이제 빈정거림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그런데 17절은 이러한 비극이 바로 『주님의 뜻하신 바』였다고 명시한다. 그러니 예루살렘은 하느님께 진심으로 「소리를 지르고」, 「눈물을 시내처럼」 흘리며, 쉬지도 말고 「일어나 통곡」(18∼19절) 해야 하고, 『굶주려 죽어가는 네 어린 것들』(19절)을 위해 간청해야 한다. 20∼22절에는 예루살렘의 절규가 제시되어 있다. 『주님, 살펴보소서』라는 간청으로 시작된 이 고백은 우리가 주목해서 봐야할 대목이다.
예루살렘이 자신의 비극을, 직접적으로 그녀를 강타한 적들(바빌론)이 아니라 하느님께 호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예루살렘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비극의 중심에 하느님이 계심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예정된 비극
「예정된 비극」이란게 있다. 실패가 눈앞에 보이는데도 그 길에서 돌아서지 못할 때, 죄송한 마음과 자괴감에 사로잡혀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욕심과 그릇된 관계를 접지 못할 때, 우리 스스로는 예정된 비극을 직감한다. 예정된 비극을 느끼면서도 돌아서지 못했던 예루살렘은, 결국 「그날」(주님 진노의 날) 가장 사랑하는 것들을 모두 잃었고, 그녀가 가장 무서워했던 사건(아이들의 죽음과 적들의 승리)과 마주해야 했다. 그러나 그런 뼈아픈 고통은 구원의 시작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통곡 속에 함께 울고 계신 하느님의 존재를 비로소 발견하고, 왜 그분이 이런 비극을 허락하셔야 했는지를 깨닫기 시작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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