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서신 통해 쥴리아 행적 확인
2) 기리시탄 탄압의 서막
조선인 오타 쥴리아 2
오타 쥴리아(大田 Julia)에 대한 선교사의 보고서는 로드리게스 지람 신부가 1605년 이에야스 측근으로 있던 쥴리아에 대한 서한을 시작으로 1606년과 1608년 에도성, 슨뿌성에서의 신앙생활, 1612년 기리시탄 심문과정과 유배된 사실, 1615년 유배지에서의 생활, 1619년과 1620년 나가사키에서의 모습과 1621년 오사카에 있는 쥴리아의 마지막 기록 등이 있다. 쥴리아가 나가사키와 오사카에 어떻게 해서 가게 되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유배 당시부터 슨뿌성에서는 쥴리아가 아마 곧 풀려날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다고 한다. 아마 이에야스가 죽기 전 1615~1616년 전후로 쥴리아를 유배해제 해 주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쥴리아의 기록 중 1606년 프란치스코회의 알폰소 무뇨스 신부가 필리핀에 있는 관구장에게 보낸 서한이 있다.
『기리시탄이 박해받기 시작하였다는 소문이 퍼졌을 때 황제(이에야스)의 궁정에 한 귀부인이 에도에서 어떻게 행동하였는가를 생략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부인의 이름은 쥴리아입니다. 신심이 깊고 자선사업에 모범적인 기리시탄이고, 상당한 기부금으로 우리들을 도와 줄 뿐만 아니라 다른 수많은 가난한 기리시탄에게도 의류와 먹을 것을 주고 있고, 때때로 교회에 나와서 성사를 받고 있습니다. 박해가 일어나자 고해성사를 받고 성체를 모셨습니다. 그리고 유언서를 써놓고 많은 물건을 정리하여 은이나 쌀, 기타의 물건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면서 「기리시탄임을 먼저 표명하지 않으면 안되는 자는 나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또 도미니코회의 프란치스코 모랄레스 신부가 나가사키에서 체포되어 스즈다(鈴田) 옥에서 1620년 2월 28일 필리핀에 있는 이코아가 사령관에게 쓴 서한이 있다.
『귀하가 쥴리아님에게 처음으로 보낸 400리어레스와 두 번째로 보낸 200리어레스는 그녀에게 확실히 전해졌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다만 기리시탄이 처해진 상황이 가혹하기 때문에 받았다는 사실을 그녀로부터 직접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쥴리아와 함께 있는 부인으로부터 편지를 받았습니다』
또 예수회 신부로서 조선인 순교자의 사료발굴에 지대한 공로자인 메디나(L.Medina ~2000)가 오타 쥴리아에 대한 자료를 최근 우연히 발견한 것이 있다. 이것은 쥴리아가 모레혼(P. Morejon) 신부에게 올린 서한을 모레혼 신부가 자필로 일본어 발음대로 로마자로 표기한 것이다. 이것으로 모레혼 신부는 유럽 사람들에게 쥴리아의 신앙을 다음과 같은 제목을 붙여 소개하고 있었던 것이다.
「황제의 궁에서 매우 우대되었지만 신앙 때문에 무인도 같은 섬에 추방된 쥴리아의 편지」
이 자필에 이어 필적이 다른 라틴어의 추문이 있다. 쥴리아의 신앙, 유배 등을 짧게 요약하여 기록한 것인데, 그 끝 부분에 「쥴리아는 가지고 있던 그리스도 십자가 밑에서 고백을 자주하였다. 그 후 일본에 불려 되돌아와 거기서 가난하게 살아갔다」라고 필기되어 있다.
박양자 수녀(한국순교복자수녀회·오륜대 한국순교자기념관 학예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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