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레의 빛 비추는 정론의 길 걷길…"
새로운 생명의 기운이 움터 나오는 이 좋은 때에 창간 78주년을 맞이하는 가톨릭신문에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가톨릭 정신을 표현하는 정론과, 사람의 정을 가득 담아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아 온 가톨릭신문이 창간 78돌을 맞이한 것은 교회뿐 아니라 우리 국가와 사회에도 많은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가톨릭신문은 어려움과 고난을 겪어온 우리 국가의 현대사와 늘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신문이 갖는 가장 큰 특징은 전국 가톨릭 교회의 소식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전해 주면서 교회의 일치와 교류에 큰 기여를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가톨릭신문은 제호처럼 글자 그대로 가톨릭의 정신을 온 세상에 드러내고 알려 주고 나누어 주는 신문입니다. 가톨릭신문은 분명히 다른 신문과 구별되는 독특한 지면을 갖고 있습니다. 가톨릭신문이 갖는 가장 큰 장점은 영성적인 가치를 지닌 기사를 독자에게 제공하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사를 쓰는 기자들의 영성적인 깊이가 그대로 반영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은 신문사와 기자들이 더욱 노력을 기울여서 신자들에게 살아 있는 기쁜 소식을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78년의 짧지 않은 역사를 지닌 가톨릭신문이 교회뿐 아니라 우리 겨레와 사회에 빛을 주는 신문이 되도록 발전하기를 기원합니다. 「가톨릭」이란 말뜻 그대로 이름에 걸맞은 역할을 위해서는 보편적이고 누구에게나 선익이 되는 신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구도 초월하고 모든 것을 넘어서서 오직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한다는 사명감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와 겨레의 발전을 선도할 수 있는 기사를 더 많이 기획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새롭게 취임하신 이창영 주간 신부님께도 큰 기대를 가지면서 다시 한번 가톨릭신문사의 모든 관계자, 기자 여러분들, 애독자, 은인 여러분들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실장)
■‘흐트러짐의 여유’ 즐길 수 있어야
같은 가톨릭신자인 한 친구가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아들이 고교생인데 주일미사에 따라올 생각을 하지 않고 동네에 있는 개신교회를 찾아 간다는 것이다.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개신교회가 성당보다 훨씬 재미도 있고 신이 난다면서 친구를 따라 그 곳으로 가겠다고 해 억지로 막지 않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고교생 아들은 『무거운 성당 분위기보다 기타를 치고 율동까지 곁들이면서 성가를 부르는 개신교회가 흥겹고 좋다』고 하더라고 그는 덧붙였다.
이 이야기는 2년 전쯤 들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그때 「아,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창 재미를 쫓아다니는 나이인 청소년들에게 성당의 미사는 너무 엄숙하고 경건하게만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기타연주가 흐르는 개신교회의 예배라면 상대적으로 훨씬 덜 무겁고 덜 지루해서 10대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요즘 젊은 신부 가운데 많은 분들이 청소년미사 때 밴드음악 등을 연주토록 하는 것도 청소년들의 이러한 성향을 감안한 것이리라.
창간 78돌을 맞는 가톨릭신문에 바라는 글을 쓰면서 「한 고교생의 경우」를 들고 나온 것은 이것이 가톨릭신문을 비롯한 교회언론에도 해당이 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다.
가톨릭신문을 보면 너무 정직하고 모범적인 것이 전부인 것 같아서 「흐트러짐의 여유」를 즐겨볼 만한 공간이 없어 보인다. 교회언론이 갖고 있는 「규범의 선」이 있다는 점을 알지만 조금은 재미가 있어야 「고교생 아들의 외도」 같은 현상도 예방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지 않을까.
교회신문의 구독자는 40대 이상의 성인들이 큰 폭을 차지하고 있으며 젊은이들이 교회 신문을 접하는 비율은 무척 낮은 것으로 알고 있다. 급변하는 매체문화 속에서 젊은이들이 교회신문을 가까이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지면의 다양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가톨릭신문을 보면서 조금 의아하게 느끼는 것은 스포츠지면이 없다는 것이다. 이따금 유명선수 가운데 가톨릭신자에 대한 소개기사가 실리는 정도일 뿐이다. 요즘 연령층에 상관없이 스포츠에 관심이 높고 특히 청소년들은 스포츠에 몰입하는 정도가 가히 「열광적」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더욱이 지금 가톨릭교회가 젊은 신자들을 성당으로 불러들이기 위해 많은 노력을 쏟고 있는 현실에 비추어본다면 교회언론들이 스포츠뉴스를 여건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최대한 다루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일반 상업지들처럼 할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스포츠면」이라는 문패를 붙일만한 지면을 확보해서 청소년들이 좋아하는 스포츠스타들의 이야기를 싣는 등의 스포츠면 운용이 있어야할 것이다.
문화면의 확충도 있었으면 좋겠다. 특히 「음악코너」같은 것을 만들어 성가 뿐 아니라 청소년들이 좋아하는 대중음악에 관한 이야기도 다뤄보면 어떨까.
교회언론이 지켜야할 한계 내에서 덜 딱딱하고 보다 유연한 지면을 꾸며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한국가톨릭교회는 지금 반가운 변화를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서울대교구가 명동성당의 많은 부분을 신자와 일반시민들을 위한 공간으로 바꾸기 위한 「기능의 리모델링」을 하겠다고 밝힌 것이 그렇다. 가톨릭신문도 조금은 생각을 바꿔 전체 지면가운데 일부는 재미가 있는 지면으로 꾸며주었으면 좋겠다.
김종완 (한국가톨릭언론인협의회장)
■하느님과 세상 잇는 다리가 돼야
가톨릭신문의 78돌을 경축하면서, 하느님의 생명의 원리를 다시 한 번 기억한다. 참으로 있는 존재만이 있게 한다. 빛이 빛을 부른다. 우리를 빛으로 부른 하느님이 우리를 있게 하시고, 우리를 빛이 되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있다」는 것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하신 것처럼, 우리와 함께 사는 모든 존재를 빛으로 인도한다는 것을 뜻한다. 빛에서 온 모든 창조물이 빛에 닿도록 「잇는」 것, 이것이 하느님께 불리어 존재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이다. 사는 것은 참으로 다리가 되어 준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가.
그러나 있는 것에 집착하거나 있는 것으로 목덜미가 뻣뻣해져서는 있는 것 자체가 오히려 어두움이다. 독이다. 아픔이고, 불행이다. 있는 것을 살아가는 방식은 도리어 「밟히기」이다.
가톨릭신문은 하느님과 세상, 그리스도와 교회, 성직계와 신앙공동체, 교회와 세계를 매개하는 다리이다. 그렇기 때문에도 다리의 존재 방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리는 사람들의 머리 꼭대기가 아니라 발 밑에 있기 위하여 존재한다. 밟히지 않으면 다리가 아니다. 영원히 밟히면 영원히 다리이다. 이것이 다리의 존재 방식이다. 이것이 다리의 「무(無)」이고, 무의 쓰임이고, 무의 있게 함이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자기 비움」의 길, 십자가의 길의 위대한 가르침 아닌가.
민중이, 신자들이, 교회가 딛고 건너게 하라. 이 갈등의 시대를. 이 신음의 강을 건너게 하라. 하느님의 생명의 나라를 향하여. 이를 위하여 가장 필요한 것이 역사를 존중하는 신문으로 거듭나는 것이라고 믿는다. 신앙과 역사를, 신자들의 영성적 갈망과 민중의 신음을 함께 들을 줄 아는 영적인 감각을 더욱 더 아름답게 꽃피워가기를 기원한다. 그리하여 그 깊은 갈망과 신음을 예수의 돌보시는 마음과 교회 구성원들, 특히 지도부의 복음화 열성에 바르게 매개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마르코 복음서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그 신새벽에 찾아가신 곳이 「버려진 자들의 땅」 갈릴래아라고 했다. 갈릴래아는 예수께서 제일 먼저 제자들을 부르셨던 곳이다.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걸으신 그 길의 첫 출발지, 그곳이 갈릴래아이다. 말하자면 제자들은 기억조차 하기 싫을 수 있는 바로 그 십자가 길의 첫 출발지, 「어두운 그늘」로 일컬어지던 그곳에 가서야 부활하신 스승 예수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느님의 자비가 실현되는 방식이다. 바로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생명의 빛으로 작용하는 방식이다.
예수는 희망이지만, 갈릴래아는 저주의 땅으로 체험했던 제자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릴래아로 갈 것인가 말 것인가는 제자들의 선택에 달렸다. 갈릴래아로 가셔서 거기서 기다리신다고 바로 전할 것인가 말 것인가, 이것은 가톨릭신문의 결단에 달렸다.
예수께서 이 시대에 어디 계신지 알고 있다면, 알고 있는 대로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는가, 우리는? 희망은 자기가 알고 있는 대로 전할 때 비로소 움트기 시작한다. 하느님의 생명의 나라에 이 시대의 민중과 신도들을, 이 시대의 교회 지도자들을 어떻게 이어 줄 것인가, 우리 가톨릭신문은? 부디, 아름다운 다리로 기억될 수 있기를 바란다. 하느님께, 신앙 공동체의 성직계 구성원들에게, 평신도들에게, 그리고 민중들에게도.
황종렬 (평신도 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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