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사의 ‘산 증인’ 역할
국내외 교회소식은 물론
가정·생명·환경·인권 등
다양한 사회문제도 다뤄
78년 역사와 전통의 가톨릭신문은 한국 천주교회사의 산 증인이다. 한국교회 역사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가톨릭신문 78년의 증언은 근현대 교회사의 연구 대상일 뿐만 아니라, 신앙의 향기를 찾고자 하는 일반 신자들의 삶과 신앙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1면 기사들을 중심으로, 78년 동안 한국 사회와 교회의 소식을 전해온 가톨릭신문의 발자취를 돌아본다.
‘천주교회보’ 창간
『本報는 左의 세가지 要求에 應하야 出生하였으니 一은 南方敎區내의 消息報道요 二는 敎會發展에 대한 意見交換이요 三은 步調一致 이것이외다』(天主敎會報 1927년 4월 1일 창간호에 실린 창간사 中에서)
1927년 4월 1일, 일단의 청년들이 월간지로 펴낸 「천주교회보」는 문맹률 80%에 미미한 교세를 고려할 때 거의 만용에 가까웠다. 천주교회보는 그후 53년 「가톨릭신보(新報)」, 54년 「가톨릭시보(時報)」, 그리고 80년 「가톨릭신문」으로 제호를 바꿨다.
「천주교회보」는 주로 교리와 신자 교육에 관련된 내용들을 실었는데, 이후 1933년 기존 청년 잡지 통폐합의 와중에 1949년까지 16년 동안 공백기를 갖는다. 1945년 해방과 함께 교회는 일제말에 휴간된 여러 잡지와 신문들을 속간하고, 「천주교회보」도 1949년 4월 1일 다시 발간돼, 복음전파, 교육운동, 사회사업 등 간접선교에 힘쓰는 교회의 노력을 전하고, 다양한 청년운동과 액션 단체들의 소식들을 활발하게 전했다.
분단 시대
그러다가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다. 「천주교회보」에는 전쟁의 후유증과 함께 멸공, 반공의 글들이 게재됐고, 외국교회의 성금과 구호품 등에 대한 소식이 실렸다. 휴전 후 사회적 안정을 회복하면서부터는 각종 단체들이 다시 활발한 활동을 시작했고, 특히 전후 지식인들의 개종기들이 심심치 않게 실렸다.
1962년 3월 10일 한국교회에는 정식으로 교계제도가 설정됐다. 「大主敎 三位 任命, 自治敎區 및 敎權上의 完全한 體制」라는 제목으로 「가톨릭시보」에 보도된 교계제도 설정으로 한국 교회는 3관구 11개 교구로 구성되는, 명실상부한 세계 교회의 일원으로 올라섰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바로 그해 10월 11일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개막됐다. 가톨릭시보는 가장 정확하고 풍성하게 공의회의 진행을 중계했으며 공의회가 모두 마친 후에도 각 공의회 문헌들을 소상하게 소개하고 해설했으며, 후에 추기경으로 서임된 김수환 사장 신부는 직접 외신을 받아 공의회의 소식을 전했다.
김추기경이 추기경에 임명된 것은 1969년 3월 28일, 가톨릭시보는 4월 6일자에서 추기경의 탄생에 환호하는 한국교회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했다. 당시 김추기경은 일본에서 발표 소식을 듣고 3월 29일 김포공항으로 도착했다.
『새 추기경을 축하하기 위해 공항에 제일 먼저 도착한 사람은 노기남 대주교, 그의 노안에 기쁨이 가득했다… 두개의 귀빈실은 꽉 찼고 광장엔 「환영 우리의 영광 김수환 추기경 탄생」이라고 쓰여진 플래카드가 나부꼈다』
민주화를 위한 투쟁
공의회 이후 사회참여에 눈을 뜬 한국교회는 민주화와 인권 수호, 사회정의를 위한 투쟁에 앞장선다. 1971년 11월 한국 주교단은 「오늘의 부조리를 극복하자」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발표, 가톨릭시보는 그 전문을 1면 전체에 게재했다.
『경제발전과 사회발전이 병행하지 않는 곳에서는 불안과 혼란이 따른다… 교회는 세속과 타협할 수 없고 부정부패와 타협할 수 없다. 자신의 부정부패의 요소를 말끔히 청산하고 우리 사회를 혼란케 하는 온갖 부정부패를 일소하는데에 앞장서야 하겠다』
이듬해에는 김추기경이 시국성명을 발표하고, 비상사태 선포와 보위법 철회를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가톨릭시보에는 이 성명서의 전문이 실리지 못했다. 성명서가 실렸어야 하는 1972년 8월 13일자 1면에는 「예수 십자가에 처형되다」라는 제목으로 예수가 십자가에서 숨을 거둘 때까지의 비장한 성서 내용들이 실렸다.
지학순 주교의 구속과 징역형 선고는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을 탄생시켰고 함세웅 신부를 비롯한 여러 신부들이 체포됐다. 1979년 오원춘 사건을 비롯한 시국 사건들에는 항상 가톨릭 교회가 연관돼 있었다.
광주, 침묵으로 시작된 80년대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의 피살에 이은 12.12 사태, 그리고 80년 5월 광주로 80년대는 시작됐다. 80년 6월 1일자 가톨릭신문에는 긴급소집된 주교회의 상임위를 거쳐 발표된 특별기도 요청 서한을 1면 톱 기사로 보도했다.
광주사태와 관련, CCK 회의실에서 긴급 상임위원회를 개최한 주교회의 상임위원회는 서한을 통해 『여하한 일이 있더라도 더 이상 같은 땅에서 같은 핏줄의 형제들끼리 피를 흘리는 인간적 충돌은 저지돼야 한다』고 천명, 『감정적 흥분과 독선적 집념을 벗어버리고 형제적 화해의 기반을 슬기롭게 마련하자』고 촉구했다.
비록 관련 보도가 간간이 있었지만, 광주의 본질에 대한 평가나 정확한 사실보도는 전혀 이뤄질 수 없었다.
하지만 80년대초는 한국교회로서는 도약의 시기였다. 1981년 10월 18일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행사는 80여만명의 신자들이 운집했고, 1984년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사업들은 대내외에 한국 교회의 위상을 떨쳤다.
특히 한국을 처음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여의도 광장에서 103위 순교성인을 탄생시킴으로써 한국교회는 보편교회의 명실상부한 일원으로 인정받는다. 같은 때, 한국교회는 200주년 기념 사목회의를 통해 미래 교회를 향한 쇄신과 복음화를 모색했다. 이어 1989년 10월에는 제44차 세계성체대회가 서울에서 열리고 교황이 재차 방한했다.
그 와중에도 교회는 민주화 운동의 선봉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1985년 김추기경은 성탄 메시지를 통해 『민주화는 오늘의 문제에 대한 해답』임을 천명하고 『정치 지도자들의 회심』을 촉구했다.
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폭로로 불붙은 범국민적 저항은 마침내 6.29선언을 이끌어내기에 이르렀다. 가톨릭신문은 7월 5일자 1면 톱에서 윤공희 대주교 집전 「정의, 평화 미사」 소식을 전하며 이를 「국민의 위대한 승리」로 평가했다.
90년대, 질적 성장의 모색
교회는 90년대 들어서 양적 팽창에 걸맞는 질적 성장의 요청에 접하게 된다. 아울러, 민주화 운동으로부터 생명운동, 환경운동, 여성 및 외국인 노동자 인권 문제 등으로 교회의 관심영역이 넓어진다.
이에 따라 가톨릭신문의 1면도 다양한 주제와 소재들을 다루고, 관련 기획기사들을 폭넓게 다루고 있다. 92년 5월과 6월, 가톨릭신문은 낙태를 사실상 합법화하는 형법 개정안 제135조를 입법 예고한데 대해 반대하는 교회의 입장들을 소상히 실었다.
특히 93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인간 생명」 반포 25주년을 맞아 다양한 운동이 펼쳐졌고, 특히 임신 10주 된 태아 발 모양의 배지 달기 운동은 큰 교육 효과를 가져왔다.
생명은 환경 문제와 함께 간다. 92년 낙동강 페놀 오염 사건과 리우 환경회의에 직접 촉발된 교회내 환경운동은 점점 많은 유관 단체들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94년 8월 이후 연말까지 가톨릭신문은 「아프리카를 살리자」는 기사들을 마련했다. 아프리카 대륙의 내전, 기아와 재해를 지원하기 위한 기사들이 실리고 수십억의 성금이 모금됐다. 한국교회는 이로써 「받는 교회에서 나누는 교회」로 성장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한편 93년 8월 21일에는 안중근 의사의 의거에 대해 교회가 단죄했던 것을 김추기경이 공개적으로 사과함으로써 의거 84년만에 그 정당성이 공식적으로 인정됐다.
국가적 위기와 대희년
90년대말부터 우리나라는 국가 경제 위기에 직면한다. 이른바 IMF 외환 위기 속에서 교회는 국민들의 고통을 함께 하기 위한 다양한 대책들을 마련한다. 가톨릭신문은 1면에서 신자들의 고통 분담을 호소하는 각 교구의 교서들을 게재하면서, 일선 본당에서 시도되는 다양한 사랑 나눔 소식들을 전했다.
세기의 전환, 새로운 천년기를 맞으며 한국교회는 보편교회와 함께 제삼천년기를 준비하는 여정에 들어선다. 보편교회는 97년부터 3년간을 대희년 준비기간으로 선포했고, 한국교회는 이러한 보편교회의 지향에 따라 특별위원회를 설치하고, 「새날 새삶」 운동을 전개한다.
가톨릭신문은 대희년 정신을 익히고 실천하기 위한 다양한 기획들을 마련하는 한편, 희년의 정신을 실현하기 위한 한국교회의 소식들을 충실하게 전함으로써 대희년을 준비한다.
90년대말부터 남한 교회는 북한 동포 돕기에 적극 나선다. 가톨릭신문 역시 북한 돕기 운동을 직접 펼쳐,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노력을 해왔다.
새 천년기 한국교회
새로운 천년기를 지난 한국교회는 이제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더욱 성숙한 면모를 갖추기 위해서 다각적인 노력을 하고 있다. 특히 다원주의 사회 속에서 이웃종교, 다양한 사상, 전통들과 공존하고 있는 한국사회 안에서 교회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면서 새로운 소명과 역할을 모색하고 있다.
가톨릭신문은 이에 따라 새로운 시대의 정체를 파악하고, 새로운 복음화를 향해 보다 철저하게 복음적 소명을 완수하기 위한 다양한 기사를 발굴, 취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한국교회의 미래를 향한 모색은 곧 가톨릭신문의 나아갈 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