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하고 있는 착각 중의 하나…. 사실 나는 내 삶이 너무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이어서, 야심이나 욕심이랄게 없는 줄 알았다. 아니 야심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내게는 주제넘고 뻔뻔스런 일이라고 생각해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렇게 단순하고 가난한 삶 안에도 야망과 욕심이 미세하게 숨겨져 있음을 발견할 때가 있다. 과잉된 자의식, 그래서 잊고 살았던 하느님과의 관계….
그런 「망각」이 비루하고 고통스런 현재의 원인임을 깨달을 때가 바로 그런 때이다. 예루살렘은, 내가 졌구나, 내가 죄를 지었구나, 라는 사실을 애가 3장에서 담담하게 인정한다. 자신이 사랑해야할 존재는 하느님뿐임을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고, 이를 통해 진정한 삶의 출발점에 다시 서게 된 것이다. 진정한 승리와 성공이 시작되는 「기점」이란, 곧 내가 패자임을 진심으로 인식한, 바로 그 순간이 아닐까.
3장
3장은, 모두 5장으로 구성된 애가의 「중심」에 위치한다.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로 제작되는 애가의 특수한 기법은 3장에서 그 극치를 이루는데, 3개의 절들이 한 알파벳으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즉, 히브리어 알파벳 22개에 3절씩의 내용이 배당되어 전체 66절(22×3)로 형성되어있다(물론 한국어 번역에서는 이러한 규칙이 발견되지 않는다).
3장이 제시하는 또 다른 특징은, 비극의 주인공이 「여인」(1~2장)에서 「남성」(3, 1참조)으로 전이된다는 점이다. 3장은 모두 세부분으로 구별되는데 첫 부분(1~20절)은 「고통스런 현실」을, 두 번째 부분(21~39절)은 「하느님의 정의에 대한 회고」를 언급한다. 마지막 부분(40~66절)은 고통을 받은 예루살렘의 「회복」을 주제로 하고 있다.
1~20절
1절은 『고통을 겪은 사나이』인 「나」와 정확히 그 신분을 알 수 없는 「그」의 관계로 시작된다. 「그」 때문에 받게 된 「나」의 고통이 절절한 심정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는 『내 살과 살갗을 닳아 없어지게 하고 내 뼈를 부수어버려』, 나를 『죽은 자들처럼 살게』 하였다(4~5절). 「나」를 그토록 고통스럽게 한 「그」의 정체가 명시되는 것은 18절에서인데, 그는 바로 「야훼」이다. 나에게 『행복을 잊게』한 존재가 주님, 야훼였던 것이다(17절 참조).
21~39절
이전까지의 내용과는 달리 이제 21절에는 「희망」이 등장한다. 22~30절에서 화자는 주님의 자애와 자비가 끝나지 않았음을 믿고 희망한다. 특별히 25~27절의 히브리어 문장은 매우 독특한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모두 「토브」(좋은)라는 히브리어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즉, 야훼의 좋으심(선하심)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31~39절에서 저자는 좋으신 주님의 정의가 두려운 심판의 상황을 변화시킬 것임을 신학적으로 조망한다. 그분은 『고통을 주셨다가도 당신의 크신 자애로 불쌍히 여기시는 분』(32절)이시기 때문이다.
40~66절
39절까지 「나」라는 화자(話者)는 혼자였다. 그러나 40~47절에서는 「우리」라는 공동체가 갑자기 등장한다. 이는, 「예루살렘의 패망」이 원래 공동체적으로 경험된 비극이었지만, 애가가 이를 한 개인의 비극으로 은유해서 제시하였기에 생긴 균열로 보인다.
애가의 저자는 「우리」라는 연대적 공동체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이제 「계약」이라는 신학적 주제에 좀 더 깊게 접근하고자 하는 듯하다. 어쨌든 그들은 자신의 죄 때문에 그토록 큰 고통을 당하였음을 자각하고, 모든 재앙과 불행을 겸허히 받아들인다.
43~54절에서는 하느님께 대한 원망의 내용이 다시 시작되는 듯하지만, 이러한 원망은 바로 하느님께 대한 신앙고백으로 이어진다(55절). 그 깊은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그는 「하느님의 이름」을 부른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57절에서, 결국 이 모든 고통을 신앙으로 극복한 화자에게 하느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다가오신다. 이후에 등장하시는 하느님은 더 이상 이스라엘의 「적」이 아니라, 그들의 「보호자」며 「후견인」으로 묘사되어 있다. 구원의 희망이 다시금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깊은 구렁 속에서 부르는 이름
바다 색깔이 크레파스 상자에 담겨져 있는 코발트블루가 아님을 알게 된 것은 바다를 처음 보고 난 이후였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바다를 마주하게 된 그날은, 공교롭게도 구름이 많이 낀 날이었다. 바다 색깔이 잿빛이라는 사실은 내게 충격을 주었지만, 이내 유익한 체험이 되었다. 「바다색은 곧 하늘색」이라는 진리를 깨닫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애가 3, 55의 표현처럼 깊은 구렁에서 하느님의 이름을 불러 보지 않은 사람은 그분의 존재, 그리고 그분의 영원하고 변치 않는 사랑을 알 수도, 기억할 수도 없다. 그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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