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까지 고귀한 영혼·초인적 의지 보여
대학에서 문학과 철학 공부
나치·공산 치하서 영적 성장
지하 신학교 들어가 사제 수업
공의회 참석 ‘사목헌장’ 다듬기도
인류 역사상 가장 격동의 순간들이었던 지난 반세기 동안 전세계 가톨릭 신자들의 영적 아버지로서 교황직을 수행했을 뿐만 아니라, 분쟁과 갈등으로 가득했던 세상에 그리스도의 참 평화를 선포해온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두 번째 천년기를 마치고 제3의 천년기에 접어든지 이미 5년, 세기와 천년기를 넘나들며 인류의 평화와 생명의 복음을 선포해온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발걸음은 여기서 멈췄지만, 그가 남긴 평화와 사랑의 메시지는 그를 기억하는 인류의 가슴 속에 남아있다.
그리스도의 고통에 동참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나약해진 육체는 오히려 그 안에 감춰진 고귀하고 강건한 영혼을 웅변했고, 고통을 통해서 더욱 깊숙이 그리스도의 고통과 희생의 참된 의미를 세상에 전했다.
마지막 숨을 고를 때까지 지난 몇 달 간, 사람들은 굽어진 어깨와 가늘고 떨리는 목소리, 흰색 제의 밑으로 흔들리는 교황의 손목에서 나약한 인간보다는 고귀한 영혼, 초인적인 의지를 볼 수 있었다.
스키와 하이킹을 즐기는 만능 스포츠맨이었던 교황의 강건한 육체는 교황 재위 동안 숱한 고난을 겪어야 했고 때로는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다. 무릎 관절염에, 허벅지뼈가 부러졌고, 어깨뼈가 빠졌으며, 맹장수술에, 저격으로 인한 후유증이 그를 괴롭혔다.
1996년 요아킨 나바로발스 교황청 대변인은 교황이 파킨슨병의 징후를 나타내고 있다고 알려주었고 사람들은 교황의 왼쪽 팔이 점점 더 심하게 떨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1999년 처음으로 교황은 성 베드로 대성당 제단에 휠체어를 타고 입장했고 이후부터는 휠체어에 의지한 모습이 자주 눈에 띄기 시작했다.
2003년 10월 19일 마더 데레사의 시복식에서 교황은 단 한 마디도 강론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지난 2월 1일 독감으로 고열 증세를 보인 교황은 응급차를 타고 제멜리 병원으로 입원했고, 3월 30일 튜브를 통해 영양 공급을 받기 시작한 교황은 마침내 4월 3일 새벽(한국 시간),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부르심
많은 전기작가들은 나치 치하에서의 경험, 공산주의 통치 아래 성장해온 그의 젊은 시절을 정치적인 시각에서 바라본다. 하지만 정작 교황 자신은 당시를 영적 성장의 중요한 시기로 항상 기억하고 있다. 그는 1997년 이탈리아에서 30여만명의 젊은이들이 모인 가운데 자신의 사제 성소에 대해 이야기했다.
『내게 가장 중요하고 아름다운 것은 내가 50년 이상 사제로서 살아왔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매일 미사를 봉헌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후일 교황이 된 카롤 보이티와는 1920년 5월 18일, 바도비체에서 태어났다.
그처럼 다양한 인생을 경험한 이들도 드물었다. 크라쿠프의 야겔로니카 대학에서 폴란드 문학과 철학을 공부한 그는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점령하자 솔베이 화학공장의 근로자로 일했다. 채석장에서 돌을 깨고 운반하며 발파작업을 했고, 수질 정화부로 힘겨운 노동을 하기도 했다.
1941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는 비로소 성소를 만난다. 아버지의 시신 앞에서 12시간을 꿇어 있던 그는 사제가 되기로 결심하고 크라코프 대교구장인 아담 스테판 사피에하 추기경이 운영하는 지하 신학교에서 비밀리에 사제 수업을 쌓으며, 유다인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고 탈출을 돕는 등 저항 운동에 가담해 게쉬타포의 요시찰 명단에도 올라 있었다. 그는 동시에 당시 지하 소극장의 발기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후 카롤 보이티와는 1946년 11월 1일 사제품을 받고 로마로 유학해 안젤리쿰 대학교에서 윤리신학을 공부했다. 그곳에서 가톨릭노동청년회(JOC)를 지도하는 마르셀 신부를 만나 노동운동을 익히기도 했다.
그 때 폴란드는 전쟁의 폐허 위에서 다시 소련군에 점령되고 공산정권이 세워졌다. 귀국 후 그는 야겔로니카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루블린 대학교에서 36세의 젊은 나이에 정교수로 강단에 서기도 했다.
1958년 7월 4일, 크라코프 대교구 보좌 주교로 임명돼 38세에 폴란드 역사상 가장 젊은 나이로 주교가 된 그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참석, 사목헌장을 다듬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어 교황 바오로 6세는 1964년 1월 그를 크라코프 대교구장으로 임명했고, 불과 3년 뒤인 1967년 6월 26일 추기경에 서임했다.
평화의 메시지
제264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미 교황으로 선출되던 당시부터 『평화의 사도』로서의 소명을 부여받은 듯하다.
1978년 10월 16일 오후 6시 18분, 뭉게뭉게 흰 연기가 시스틴 성당의 굴뚝에서 피어올랐다. 전통적으로 새 교황이 탄생했음을 알리는 이 신호를 본 전세계의 모든 가톨릭 신자들은 뜨거운 환호를 올렸다.
하지만 이어, 사람들은 놀라움과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새 교황으로 선출된 카롤 보이티와, 그는 이탈리아 출신이 아닌, 공산국가 폴란드 출신으로 당시 크라코프 대교구를 이끌던 추기경이었다.
1523년 네덜란드 출신의 하드리아노 6세 교황 이후 무려 455년만에 탄생한 비이탈리아계 교황, 그것도 냉전의 시대에 공산국가 출신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됐다는 것은 교회사적으로 뿐만 아니라 세계사 안에서도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잠시 후, 성 베드로 대성당 발코니에 모습을 드러내고 『예수 그리스도는 찬미받으소서』하고 외친 새 교황의 모습을 본 신자들은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그것은 둘로 나눠진 인류를 하나로 일치시키려는 하느님의 섭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도덕적 승리
교황은 1993년 한 인터뷰에서 말했다.
『나는 (공산주의 몰락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그리스도교 자체, 그 신앙 내용과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메시지였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인간 존재를 수호하는 교회 본래의 활동입니다. 내가 한 일은 단지 이 사실을 상기시키고, 고집스럽게 되풀이한 것 뿐입니다』
교황청의 외교방식은 조용한 물밑 협상이었다. 요한 바오로 2세도 그런 방식을 지지했지만 이내 공산주의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1984년 그는 리투아니아 순방을 가로막은 소련 정부를 공개적으로 비난했고, 공산주의 정권을 『우리 시대의 수치』라고 지적한 문헌을 승인했다.
동유럽에서 자유를 위한 투쟁에 시금석이 된 것은 교황의 고국 폴란드였다. 수 차례의 고국 순방을 통해 교황은 연대 노조를 지지하고 그다니스크 광장에 모인 수백만을 향해 『미래를 위해 힘을 모으자』고 촉구했다. 2년 뒤 연대노조는 최초의 자유총선을 통해 정권을 장악했고, 유럽의 공산주의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교황이 공산주의와 대면해 의지한 것은 서방 사회가 아니었다. 교황은 1989년 12월 소련 공산당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와의 세기적 만남을 실현시켰고, 이 만남은 반목과 냉전의 시대를 청산하는 디딤돌을 놓았다.
교황은 90년 4월 또 다른 공산국가인 체코슬로바키아를 방문했고, 당시 하벨 체코 대통령은 교황의 방문을 『기적』이라고 부르며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환영했다.
교황의 공산주의를 무너뜨리기 위한 전략은 이들이 국제적인 인권 협정에 서명하고, 이에 따라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었다. 1998년 역사적인 쿠바 방문에서도 교황의 이러한 전략이 엿보인다. 교황은 국제사회에 쿠바에 대한 금수조치 등 외교적 고립 정책을 중단할 것을 촉구하는 한편, 피델 카스트로 쿠바 대통령에게는 새로운 정치, 종교 개혁을 요구했다.
교황은 결코 이념적 승리를 주장하지 않는다. 그것은 도덕적 승리였다. 그래서 그는 『공산주의의 무덤 위에서 춤을 추기보다는』 통제되지 않는 자본주의의 폐해에 대해서 경고했다.
104회 해외순방 129개 나라 찾아 평화 호소
동서교회 일치·종교간 대화 노력
최빈국 부채 탕감 선진국에 요청
역사상 교회 잘못 용서 청하기도
신앙·윤리·교의 수호에는 양보없어
고령과 건강상의 문제가 다소 장애가 되긴 했지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지구촌 순방을 멈추지 않았다. 1979년 1월 멕시코와 바하마 방문에서 시작된 그의 순방은 지난해 8월 14일과 15일 프랑스 루르드 방문까지 104회의 해외순방으로 129개 국을 다닌 그는 교황의 직무 수행 형태를 아예 바꿔놓았다.
행동하는 교황
그중 21회(1984년 5월 2~12일)와 44회(1989년 10월 6~10일) 해외순방 여정에는 우리나라도 들어있었다. 이탈리아내의 사목방문은 146회, 로마 교구장으로서 333개 로마 교구내 본당을 방문했다. 연평균 4회의 해외순방을 한 교황의 보좌관들은 그를 말렸지만, 교황은 번번이 더 많은 스케줄을 적어놓았다.
개인적으로 가장 감격적인 순방은 아마도 2000년 대희년의 성지순례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집트에서 시작해 시나이산을 거쳐 요르단과 이스라엘, 팔레스타인에 이른 여정을 통해 교황은 성서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을 묵상하고, 세상의 평화를 기원했다. 이듬해에는 이 여정을 더 늘여, 그리스와 시리아를 찾아갔다.
건강이 악화돼 말하는 것조차 힘들었던 지난해에도 교황은 아제르바이잔과 불가리아를 방문했고, 걷지도 못해서 휠체어를 타고 비행기를 오르내리면서도 스위스와 루르드를 방문했다.
처음부터 교황은 바티칸을 떠나 신자들과 어우러지는 것을 좋아했다. 1983년 교황은 왜 그렇게 순방을 다니느냐는 질문에 『나도 내가 너무 많이 다니는 것을 알아요. 하지만 때로는 지나친 것도 필요하지요』라고 말했다.
교황의 순례는 세계 정치와 경제의 심장부 뿐만 아니라 사막과 정글의 오지, 포연 가득한 전쟁터의 한가운데까지를 막론한다. 평화의 사도로서 그의 발걸음이 머무는 곳에서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 숨겨진 평화의 열망이 기지개를 켠다.
1998년 방문으로 쿠바는 세계에 문을 열었고, 이에 앞서 교황은 1997년에는 레바논과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지역을 잇달아 방문했으며, 대희년 성지 방문은 화약고 중동의 평화 정착을 위한 또 하나의 전기를 마련했다.
하지만 평화의 사도로 지구촌 구석구석을 누빈 교황이지만 아직도 미답의 땅은 남아있다. 특히 이 나라들은 교황이 오랫 동안 방문하기를 염원해온 곳들이라서 미완성의 순례가 안타깝다.
그 하나가 바로 중국이다. 중국 순방은 교황의 가장 열렬한 희망이었다. 엄청난 인구와 복음화의 잠재력을 지니고 얼마 남지 않은 공산국가인 중국 순방은 특히 제삼천년기, 아시아 교회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더 절실한 과제였다.
그에 못지 않은 순방 희망지가 러시아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고르바초프, 옐친 등 전 대통령들이 교황의 방문을 여러 차례 요청함으로써 정치적 여건은 마련됐지만, 러시아 정교회측의 반대로 지금까지 성사되지 못했다. 특히 지난 2001년, 러시아에 4개의 교구가 신설된 이래 악화된 정교회와의 관계는 러시아 방문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교회 일치 노력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교회 일치 노력은 『로마의 주교는 모든 교회의 일치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는 무엇보다도 일치의 첫 번째 봉사자이다』라고 했던 자신의 말대로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26년이 넘는 재위 기간 동안 교황은 동서방 교회의 일치를 위해 노력했다.
2000년 대희년은 교회 일치에 대한 교황의 의지가 다시 한 번 확인되는 계기였다. 교황이 1995년 발표한 회칙 「하나 되게 하소서」(Ut Unum Sint)은 이후 교회 일치 대화의 주요한 주제가 됐다. 이에 앞서 1999년 교황청은 루터교와 의화에 관한 공동선언에 서명함으로써 교회 일치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역사상 어느 교황보다도 요한 바오로 2세는 비그리스도교 종교들과의 중요한 교류를 기록했다. 유다교와의 관계에서 교황은 회당을 방문하고, 죽음의 수용소에서 기도를 바쳤으며 유다교 박해를 저지하지 못한 교회의 잘못에 대해 사과하는, 홀로코스트에 관한 문헌을 승인했다.
교황은 1986년에는 아시시에서 세계 평화를 위한 종교인들의 기도 모임을 마련해, 모든 종교의 지도자들을 초청, 인류 평화를 위해 함께 기도를 바쳤다. 9.11 테러 이후, 2002년에 또 다른 아시시 기도 모임을 열어 모든 종교인들과 함께 평화를 위해 기도했다.
그 외에도 재위 기간 동안 교황은 수많은 종교 지도자들과 만나 깊은 상호 이해와 존경, 대화를 통해 서로의 믿음과 가치를 교류했다.
도덕적 지도력
교황은 가톨릭교회의 영적 아버지이자, 인류의 스승으로서 도덕적 권위에 바탕을 둔 리더십을 발휘함으로써 전세계에서 유례없는 지도자였으며 그의 이러한 도덕적 지도력은 인권 수호, 윤리적인 악에 대한 비판, 세계 평화의 호소 등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교황의 지도력은 교회의 종교적 가르침을 보편적 윤리 규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들에 적절하게 적용함으로써 교회 밖에서도 발휘됐다.
우선 그는 전쟁을 반대했다. 비록 가시적인 성과는 거두지 못했지만 2003년 이라크 전쟁에 대한 비판은 그 전쟁에 대한 윤리적 판단을 내렸다. 교황은 이어 9.11 테러 이후 빈발해진 테러와 폭력에 대한 영적 캠페인을 이끌었다.
생명윤리는 가장 논란이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다. 예컨대, 그는 1994년 낙태와 인구조절 등을 포함한 유엔의 인구 정책을 비판했고 국제개발회의를 생명과 가족 문제에 대한 논의의 장으로 유도했다. 같은 맥락에서 사형폐지와 관련해 교황은 자주 미국내의 사형 집행에 대해 비판했다.
최빈국의 부채 탕감은 경제적인 면에서 교회의 가르침이 적용된 사례이다. 교황은 2000년 대희년을 지내면서 제삼세계의 부채를 탕감해줄 것을 선진국들에게 줄기차게 요구했다.
교황은 순방지를 다닐 때마다, TV 카메라를 의식한 행동을 즐긴다. 이는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직접 만날 때 더욱 그러하다. 교황은 이에 대해 한 인터뷰에서 말했다.
『내가 쓰러져가는 움막들을 찾아가는 것은 내가 가면 카메라가 따라올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카메라들은 나와 함께 지구촌의 인간들이 안고 있는 문제들을 함께 비출 것을 나는 압니다』
엄격한 신앙, 윤리적 가르침
교황은 14편의 회칙을 포함한 많은 문헌들을 통해 시대에 요청되는, 나아가 시대를 초월하는 진리들을 가르쳤다. 경제와 사회정의를 다룬 회칙들을 반포했고, 국제 사회의 빈부격차를 비판했으며, 만연한 윤리적 상대주의를 고발하고 그것이 세상과 사회에 큰 도전이 될 것임을 지적했다.
이러한 지침들을 바탕으로, 교황청 각 부서는 외채 문제, 인공 수정, 무기 산업, 대중매체와 인터넷 등등 다양한 문제들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발표했다. 그리고 이러한 가르침들의 바탕에는 하나의 핵심적인 주제가 있다. 그것은 인간이 하느님 모상에 의해 창조됐음을 망각하면 인간 자유는 파괴적이 된다는 것이다.
교황은 또 교회의 과오에 대해서도 용감하게 인정하고 용서를 청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 종교 전쟁, 선교 역사에 이르기까지 교회 구성원들의 과오에 대해 머리를 숙였다. 뿐만 아니라 종교 재판, 십자군 전쟁, 홀로코스트의 와중에서 그리스도교의 잘못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연구를 하도록 했다.
하지만 교황은 신앙과 윤리 문제에 있어서는 확고한, 때로는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래서 교의적인 측면에서 양보 없는 태도를 보였다. 교의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판단되는 신학자들에 대해서는 결연히 단죄했다. 1979년 한스 큉을 시작으로 신앙교리성은 많은 신학자들에게서 교수 자격을 박탈했고 공의회의 개혁을 받아들이지 않는 전통주의자 르페브르 대주교를 파문했다.
피임, 낙태, 동성애 등에 대해서는 변함없는 반대 입장을 견지하면서 1993년 회칙 「진리의 광채」를 통해서 이런 문제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또 1992년 신자들에게 분명하고 확실한 교의를 설명하기 위해서 「가톨릭교회 교리서」를 반포했다.
교황은 또 공의회에서 강조한 평신도의 소명에 대해 지지하면서도 평신도와 서품된 사제직 사이의 소명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했다.
인류의 스승
요아킨 나바로발스 교황청 대변인은 한 기자회견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현대인들의 영적 복지에 대해 염려하는 유일한 세계 지도자』라며 『교황은 사람들에게 「원하는 것」, 「사고 싶은 것」을 묻는 대신에 「당신은 누구입니까?」하고 묻는다』고 말했다.
교황의 전기 작가인 조지 비겔은 『교황은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복음의 증거자이며 그리스도교 신앙이 지닌 해방의 힘이 가장 이상적으로 구현된 인물』이고 바로 그 때문에 『교황은 오늘날 교회 뿐만 아니라 세상과 인류에 엄청난 영향을 미쳐왔다』고 말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회 안에서는 신앙의 교사요 최고 목자였을 뿐만 아니라, 세상과 인류에게는 영적인 스승으로서, 복음의 가르침을 선포해왔던, 이 시대의 참된 영웅이었다.
사진설명
▶교황 유해 운구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나약해진 육체는 오히려 그 안에 감춰진 고귀하고 강건한 영혼을 웅변했고, 고통을 통해서 더욱 깊숙이 그리스도의 고통과 희생의 참된 의미를 세상에 전했다.
▶교황과 고르바초프와의 만남
교황은 1989년 12월 소련 공산당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와의 세기적 만남을 실현시켰고, 이 만남은 반목과 냉전의 시대를 청산하는 디딤돌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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