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이야기를 읽었다. 사랑에 빠질 때 여자는 남자보다 아홉 배는 더 사랑한다는 내용이었다. 더 슬픈 이야기도 있다. 교육론 「에밀」로 유명한 루소는 정작 자신의 아이들을 모두 고아원에 내다 버렸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게 사실이라면, 루소보다 자기 아이들을 아홉배는 더 사랑했을 아이들의 엄마는 어디 있었던 것일까?
이번 주에 살펴볼 애가 4장은 너무도 충격적인, 그러나 오늘도 무수히 일어나고 있을 일상의 비극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다. 「자기 자식을 잡아먹는 매정한 어미 예루살렘」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엄마들이 자신의 욕망과 자식의 욕망을 동일화시키거나 혼동할 때, 아이의 심장은 멎어버린다. 아이자신은 실종되고 엄마의 욕망과 환영(幻影)이 아이를 대체하기 때문이다. 자기 아이를 잡아먹는 예루살렘과 다를 바 없는 상황이 그대로 우리 현실 안에도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엄마의 욕망 때문에 멎은 심장으로 성장한 아이들이 결국 성인이 되어 엄마의 그늘을 벗어날 때면, 그 반대의 현상이 발생한다. 이번에는 엄마의 심장이 멎게 되는 것이다. 자식의 매정한 외면에, 그리고 그 비극적인 고독에, 말라버린 심장으로 노후를 살고 싶지 않다면, 대한민국의 모든 엄마들은 바로 이 순간부터라도 진정한 사랑을 시작해야 한다. 절망과 회한이 인생의 마지막을 삼켜버리는 일이 없도록….
4장
4장 1절은 「에카」라는 탄식의 소리로 시작되는데, 이는 1장, 2장과 동일한 시작이며, 예루살렘의 비통한 현실이 이어진다. 『황금과 보석이 더 이상 빛을 내지 못하고 거리에 흩어져 있다』는 1~2절의 표현은 한 때 화려했던 예루살렘의 처참한 상황을 은유한다.
3~10절의 내용은, 어미 품에서 굶어 죽어가는 아이들을 묘사한 애가 2, 11~12.19~20의 이미지와 유사한 것으로 되어 있다. 특별히 여기서 부각되어 있는 소재는 「사막의 타조」(3절)인데, 이 동물은 자기 자식에게 무관심하고 매정한 동물로 유명하다. 알을 모래에 낳아 그대로 방치하고 전혀 돌보아 주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욥 39, 13~18참조).
애가의 저자는 굶어 죽어가는 아이들에게 아무 것도 해 주지 못하는 어미 예루살렘의 모습을 타조에 비유하고 있다. 사정이 그러하니, 맛있는 것만 먹고 고급 옷만 입고 다니던 예루살렘의 아이들은 이제, 거리 여기저기에 쓰러져 있고, 쓰레기 더미와 함께 쌓여 있다(5절). 예루살렘의 고통이 이렇게 극심한 것은 그녀의 죄가 「소돔」의 죄보다 더 큰 때문이었다(6절). 예루살렘이 겪는 극도의 고통은 이제, 차라리 칼에 찔려 죽는 것이 낫겠다는 호소로 이어진다(9절). 10절의 표현은 매우 충격적인데, 자식을 잡아먹는 어미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품에서 죽어가는 자식을 보며 절규하던 2, 20의 모습과는 매우 대조적인 모습이다. 「식인」(食人, Cannibalism)은 구약성서 안에서도 매우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신명 28, 53~57참조).
11~12절은 예루살렘이 그런 처참한 지경에 이를 것이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고 묘사한다. 예루살렘은 하느님의 도성이며, 하느님의 처소이니(시편 46, 5) 당연히 안전할 것이라는 그릇된 믿음과 허황된 자만이 문제였던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이의 예상을 뒤엎고 하느님은 당신 친히 예루살렘을 치셨다(11절).
13~16절은 그렇게 예루살렘이 당한 극도의 고통과 징벌이 사실은 정치적, 종교적 지도자들의 죄 때문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사제들과 예언자들은 무고한 자들의 피를 흘리게 했고(13절), 백성은 「피를 흘린다는 이유」만으로 그 의인을 부정한 자로 간주하였다. 유다인들은 피를 부정한 것으로 간주하였기 때문이다(레위 12, 5.7 참조). 그렇게 비참한 지경에 빠진 예루살렘을 도와줄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었다. 하느님의 징벌과 분노 앞에서는 그 어떤 외교적 동맹관계나 노력도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4장 마지막에서는 이스라엘의 적수였던 에돔에 대한 징벌이 예고되고, 반대로 예루살렘에 대한 구원과 회복이 약속된다. 『죄벌은 끝났다』(22절)는 것이다.
멀어진 시선
인간은, 스스로가 얼마나 타인으로부터 멀어졌는지는 기억하지 못한 채, 멀어진 타인만을 그리워하거나 원망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 때문일까, 상실감과 고독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예외 없이 경험하는 보편적 감정이다. 그런데 예루살렘은 『헛되이 도움을 바라느라 우리 눈이 멀어졌다네』(17절)라고 고백함으로써, 하느님(혹은 타인)이 내게서 멀어진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진 것이 문제였음을 정확히 성찰한다. 다른 곳을 보느라 멀어진 시선이라….
『시선이 먼 데를 본다는 것은 아름답고 또한 위험한 일』이라고 표현한 어느 작가의 말이 기억난다. 위험할 수도 있는, 하느님이 아닌 다른 곳을 향하던 시선을, 이제는 접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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