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스컴을 통해, 병중에 계셨던 교황님을 뵙는 것은 고통스런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힘든 모습 속에서도 그분이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진실은, 살아있는 한 하느님이 주신 생명과 삶, 시간을 성실히 살아내야 한다는 「삶에 대한 경외」였던 것 같다. 왜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견딜 수 있다고 했던가….
교황님이 한국에 처음 방문하셨을 때, 성당에서 나눠준 책받침 때문에 내 마음의 우상이 잠시나마 바뀌었던 것을 기억한다. 당시 아이들에게 우상은 늘 책받침 안에 존재했었다. 영화배우나 야구선수의 사진을 코팅해서 책받침으로 쓰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교황님을 우상처럼 책받침에 담아 사랑했던 시절이었다. 그분의 선종을 통해 아름답고 충실했던 시절을 기억할 수 있었으니, 그것 또한 감사할 일이다.
구약성서가 고발하는 예루살렘의 죄는 언제나 「하느님을 잊은」 데에서 발생했다. 하느님을 잊고 살아온 세월,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구체적인 죄였고 비극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깨달은 예루살렘은 이제 애가의 마지막에서 『기억 하소서, 바라보소서』(5, 1)라는 탄원을 쏟아내며 간청한다.
잊혀짐과 바라봄, 망각과 기억. 이는 단순히 예루살렘만의 문제가 아니라 주변의 모든 관계에서, 무엇보다도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되풀이되고 있는 우리네 삶의 딜레마가 아닐까.
5장
5장은 1, 2, 4장의 경우처럼 전체 22절로 구성되어 있지만, 알파벳시 형식을 따르지는 않는다. 히브리어 본문은 매우 체계적인 운율과 대구법(parallelism)으로 되어 있는데 5장 전체의 내용은, 당신 백성에게 구원의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청원하는 기도로 요약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첫 구절은 야훼의 고유한 이름을 부르는 것(주님, 기억하소서!)으로 시작된다.
이스라엘이 받은 축복의 가시적 표현이었던 「약속의 땅」은 남들(외국인과 이방인)에게 넘어갔고(2절), 예루살렘은 이제 사회에서 가장 고립된 존재, 고아와 과부처럼 되어버렸다(3~4절). 더욱 예루살렘에 고통을 주는 일은 자신의 하급자였던 이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8절).
그뿐인가, 굶주림, 폭행, 살인 등으로 온 사회는 혼란에 쌓여 있었다(11~14절). 마음에서 기쁨은 사라졌고, 예루살렘이 누렸던 모든 영화와 명예는 추락하였다(15~16절). 그러나 16~17절에서 애가의 저자는 다시금, 이런 모든 고통이 자신들의 죄 때문임을 고백한다. 그 죄 때문에 마음은 괴롭고 눈은 어두워 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회개하며 용서를 바라는 백성을 물리치지 않으신다(19절). 20절에 반복적으로 제시되고 있는 수사학적 질문들, 『어찌하여 저희를 끝내 잊으려 하시나이까?…. 버리려 하시나이까?』라는 부르짖음은 결국,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잊지도, 버리지도 않으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에 대한 믿음과 확신을 드러낸다.
이러한 확신 속에 이제 이스라엘은 「회개의 은혜」를 간청한다. 『저희를 당신께 되돌리소서』 이러한 간청은 매우 신학적인 의미를 내포하는데, 이를 통해 이스라엘은 비로소, 회개도 하느님의 은총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임을 깨닫기 때문이다.
22절에는 다시 한번 수사학적 질문이 등장한다. 『저희를 물리쳐버리셨나이까? 저희 때문에 너무도 화가 나셨나이까?』 이는 예루살렘이 처한 상태에 대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애가는, 통곡도 복수도 아닌, 회개의 은총을 청하는 기도와 현 상태에 대한 인식으로 마무리 되고 있다.
축하해, 예루살렘!
차라리 내가 피해를 입는 편이 낫지, 남에게 폐 끼치는 일만큼은 죽기보다 싫어하는 사람들이 바로 한국 여성들 아닌가 싶다. 나부터가 그렇고 어머니가 그러시며, 할머니도 그러셨다. 물론 할머니의 할머니도 그러셨을 것이다. 혹시라도 본의 아니게 폐를 끼치게 되면 죄송합니다, 용서 하세요, 라는 표현이 자동적으로 튀어 나온다.
너무 깍듯한 예의는 타자와 주변을 부담스럽게 할 수 있지만 기본적인 예의는 세상을 돌아가게 하는 원리요 질서이다.
아무튼, 예루살렘은 이제야, 죄송합니다. 용서해주세요, 라고 말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그토록 긴 고통의 심연을 건넌 뒤에야 비로소 자신의 죄가 하느님께 너무도 죄송한 일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더욱 값진 결실은, 자신의 힘만으로는 과거의 습관에서 해방될 수 없음을 깨닫고, 애가의 마지막을 『야훼여 주께 돌아가도록 우리를 돌이켜 세워 주십시오』(5, 21)라고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용서 청하는 법을 배우게 된, 그리고 자신의 고통과 죄를 하느님께로 가져와 직접적으로 소통하는 지혜를 배우게 된 예루살렘에게, 그러므로, 축하해 라는 인사는 결코 요란한 비약이 아닐 것이다.
용서를 구할 수 있는 용기, 그것은 고통의 현장에서 하느님의 구원을 발견하는 최초의 각성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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