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은 벽에 머리를 부딪친 후 머리가 더 좋아졌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더 나빠졌다고 한다.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창문에 머리를 부딪친 후 여러 날을 혼수상태에 있다 깨어났는데, 이후 훨씬 훌륭한 작품들을 남기게 되었다고 한다.
반면, 여기저기 잘 부딪치고 다니는 암울한(?) 습관을 수십 년째 간직하고 살고 있는 필자는 후자에 속하는 것 같다. 불과 1분전에 하던 이야기의 내용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가 하면, 얼마 전 수업시간에는 한 학자의 주요학설을 열을 내서 설명하다가 다른 학자와 혼돈한 적도 있다. 학생들에게 잘난 척이나 하지 말걸…. 즉시 미안한 마음을 표현했지만, 이미 구겨진 스타일은 수습하기 어려웠다. 애교와 미소작전도 무색하고, 진땀나는 변명도 초라할 뿐이다. 나이가 들면서 생겨난 건망증에, 병인가? 라는 생각도 해보지만, 이제는 그냥, 내 삶이 총명함과는 더더욱 거리가 먼 인생이 되었구나, 쯧쯧…. 그러면서 포기하고 있다.
이처럼 한 가지 사건에 대한 결과는 매우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어찌 보면 불공평한 일일지 모르지만, 그건 아마도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내공과 하느님의 은총이 합치된 결과일 것이다. 나 역시 조금만 더 열심히 살았더라면 지금의 건망증은 나타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오늘부터 우리는 인생의 어느 고비에서 만나게 된 난관을 새로운 도약의 기회로 전환시켰던 의지의 여성을 만나보게 될 것이다. 자신과 민족의 운명이 거의 몰살의 위기에 몰렸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 대한 강한 신앙과 삶에 대한 신념으로 그 난관을 이겨낸 아름다운 에스델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녀를 닮은 화사한 봄에 이 책을 읽게 되어 더욱 즐거운 기분이다.
개관
에스델서는 「메길롯」의 마지막 책으로, 「부림절」(Purim) 때 낭독되었다. 이 책이 「부림절」의 기원을 설명해주고 있다고 간주된 때문이었는데, 등장인물 하만이 유다인들을 절멸시킬 날을 정하기 위해 「주사위」를 던지는 장면이 부림절의 기원이라고 보았던 것이다(부림절의 「부림」은 「부르」라는 히브리어의 복수형이며 「주사위」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 「부르」가 원래 아카디아어에서 유래했다는 입장도 있어서, 원래 이방민족의 축제였던 것이 후대에 이스라엘 안에 도입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즉 이스라엘은 이민족의 축제였던 부림절을 도입하여 자신들의 야훼신앙에 부합하는 축제로 재구성했다는 것이다.
본문의 문제
에스델서를 읽을 때 항상 부닥치게 되는 문제는 본문의 복잡한 장, 절에 대한 것이다. 이러한 혼란은 희랍어 번역인 칠십인역이 히브리어 본문에 93개의 절을 추가함으로써 초래되었는데, 아마도 칠십인역은, 히브리 본문이 하느님께 대한 직접적 언급을 뚜렷이 포함하고 있지 않기에, 여기에 신학적이고 종교적인 내용을 보충하려고 93개절을 추가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도교는 이러한 종교적 성격 때문에, 칠십인역의 첨가부분만을 전례 중에 봉독하고 있다. 추가된 부분의 배치에도 문제가 있는데, 칠십인역은 첨부한 부분을 히브리어 본문에 적절히 삽입하고 있는 반면, 불가타는 첨가부분만을 따로 발췌하여 뒷부분의 부록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어 번역인 새번역은 칠십인역의 형태를 따르고 있고(첨가된 부분을 이탤릭체로 표기), 공동번역은 라틴어 번역의 형태를 따르고 있다.
경전성
에스델서는 하느님에 대한 직접적 언급을 내포하지 않고 있으며, 이민족의 축제를 토착화하려는 목적에서 제작되었다고 간주되었기에, 처음에는 경전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에스델서는 신약성서에 단 한번도 인용된 적이 없으며, 모든 성서 사본이 부분적으로나마 발견된 꿈란 유적에서 조차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서기 100년경 개최된 얌니야 회의에서 히브리어 본문이 유다인들의 경전에 포함되었고, 1546년 트리엔트 공의회에서는 에스델서 전체(첨가된 부분까지)를 가톨릭 교회의 경전으로 인정하였다. 즉 히브리 본문을 제1경전으로, 희랍어 본문을 제2경전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삶의 도전들
인생의 어느 고비에 이르게 되면, 자신의 전존재를 다해 삶에 응답해야할 시기가 오는 것 같다. 성서신학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은 그렇게 자신을 완전히 뒤 짚는 듯한 소용돌이를 치열하게 통과하면서 비로소 참 자신과 조우하게 되고, 그런 고통을 허락하신 하느님께 다다르게 된다.
온갖 궁중의 화려함을 경계하고 오로지 하느님으로만 삶을 무장시킨 에스델의 지혜를 통해, 우리 삶도 하느님으로 더 충일해 지기를 희망해 본다. 에스델이 경험한 기쁨과 슬픔, 고독과 혼란은 사실 우리 모두의 삶에 예외 없이 등장하는 요인들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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