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가난으로 참 사랑 나눠
약자의 편에 서서 투쟁, 노예제도 철폐에도 노력
네제의 노틀담 트라피스트 수도회에 입회한 후 마리 알베릭(Marie-Alberic) 형제로 불리게 된 푸코는 이곳에서 오래 머무르지 않고 좀 더 가난한 삶을 찾아 시리아의 아크베(Akbes) 수도원으로 떠났다.
그러나 나자렛에서 가난하게 살다간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동경했던 푸코는 이곳에서도 자신이 원하는 만큼의 가난한 삶을 실현하기 힘들었고 이런 배경에서 작은 그룹으로 살면서 가난한 사람들에 동참하는 수도회 창설을 생각하게 됐다. 「참으로 가난과 형제적 사랑으로 함께 하며 누구에게나 열린 자세를 가지는 곳, 또 단순한 정신으로 다가오는 모든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지니는 곳」.
너무나 엄격하고 극단적인 삶으로 구상된 수도 회칙 초안을 두고 위벨렝 아빠스는 이의를 제기, 동의하지 않았으나 그러한 반대 속에서도 푸코는 나자렛 예수의 생활을 구현하기 위한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다. 세부적인 내용들을 수정하기는 했으나 기본적 영성은 그대로 유지시켰다.
1897년 트라피스트회 총원장 허락을 받고 「나자렛에서의 삶」을 위해 수도회를 떠난 그는 그렇게 열망하던 나자렛으로 떠나 현지 글라라 수녀회 사환으로 근무하면서 허름한 옷을 입고 낡은 판자집에서 기거하는 생활을 시작했다. 수녀회의 허드렛일을 하며 나머지 시간은 관상 기도를 하는데 보낸 푸코는 그러한 생활 안에서 나자렛 예수가 보여 주었던 삶을 따르려 노력했다.
수도회 설립을 위해서는 먼저 사제가 되어야 한다는 주변 권유에 따라 1900년 프랑스로 건너간 푸코는 서품 준비를 하면서 북아프리카 지역을 떠올렸다. 아직 예수와 그의 복음을 모르는 이들에게 「나자렛에서의 삶」을 알려주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서 였다.
1901년 사제로 서품된 후 사하라 사막 변경 베니 아베스(Beni-Abbes)라는 지역에서 형제회 설립을 준비한 푸코는 그곳에서 원래 계획했던 나자렛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많은 시간동안 무릎을 꿇고 성체 앞에 앉아 기도했으며 예수가 인류를 위해 기도했듯 그렇게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했다.
작은 오아시스이자 국경 수비대가 주둔하고 있었던 지역 특성으로 이곳에는 그만큼 오아시스에 사는 은수자들, 카라반들, 수비대 사병들과 장교들로 북적였고 또 그들은 푸코를 즐겨찾는 단골 손님이 되었다.
『저는 외적인 일에 너무 많이 관여하게 되어 글을 읽을 시간은 물론 묵상을 할 시간도 별로 가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불쌍한 군인들은 저에게 지속적으로 옵니다. 노예들도 언제나 자신들을 위해 지어 놓은 집을 채우고 있습니다. 여행자들도 다가와 형제애를 호소하고 가난한 자들은 언제나 넘칩니다…』
사하라 사막 남쪽으로 자주 여행을 했던 푸코는 1905년 8월 뛰아레 지역 사하라 사막 한복판 작은 오아시스였던 타망라쎄에 은수 생활을 위한 지부를 설립했고 1910년에는 이곳에서 10km 떨어진 아세크렝 고원 지역에 또 하나의 작은 지부를 만들었다.
기본적으로 관상적인 삶을 유지하면서 몇시간이고 성체 앞에서 예수의 삶의 자세로 깊숙이 들어가는 생활을 해나갔다. 그러한 삶 가운데 그는 또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위해 투쟁했으며 여러 사람들의 묵인 하에 지속되던 노예 제도 철폐를 위해서도 파리에 있는 국회에 탄원서들을 제출하는 등 노력을 쏟았다.
사하라 지역 발전을 위해 기차 전보 천문대 등 새로운 기술들에 관심을 가졌던 푸코는 지역 여성들에게는 뜨개질을 가르쳤고 무엇보다 뛰아레의 언어와 문학적 전통을 발전시키기 위해 눈을 감기 전까지 프랑스-뛰아레어 사전을 만드는 작업에 헌신했다.
열정적이고 복음적이었던 생애가 무색하게 그의 마지막은 예상밖의 현실로 어느날 갑자기 다가왔다. 1916년 12월 1일 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 틈을 타서 리비아의 한 도적떼가 프랑스 식민지 사하라에 폭동을 일으키기 위해 침범해 왔고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성채를 짓던 푸코는 이들에 의해 끌려나와 우연한 총격에 희생됐다. 괴한들을 처리하기 위해 프랑스 군인들이 나타났고 이 와중에 푸코 곁에 있던 한 젊은이가 총을 겨눴던 것이다.
아프리카의 이슬람교 신자들 사이에서 순응적인 새로운 포교 방법을 창시한 것으로도 주목을 받고 있는 그의 생애는 삶으로 실천되는 복음이었고 실천적인 가난이었으며 버려진 사람들 가운데 숨어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철저한 사랑으로 설명된다.
나자렛 예수를 닮으려 했던 그의 삶은 사후에도 그를 따르려는 공동체들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예수의 마들렌 작은 자매(Sister Madeleine for Jesus 1898∼1989)는 사막의 유목민들 가운데서 그들의 형제 친구로 살아갔던 푸코의 영성에 따라 「예수의 작은 자매들의 우애회」(1939)를 설립했으며 러네 부아욤(R. Voilla
ume 1905∼) 신부 등 다섯 명의 사제들은 푸코의 삶에 감화를 받아 1933년 파리 몽마르뜨 예수성심 대성당에서 「예수의 작은 형제회」를 창립했다. 1901년 푸코가 베니 아베스의 유목민들 사이에서 첫 공동체를 만든 이후 공식적인 형제회의 탄생이었다.
예수의 작은 자매들의 우애회는 현재 약 70개 가까운 나라에서 우애의 집을 설립, 가난한 사람들 속에서 세상에서의 관상생활을 하고 있으며 예수의 작은 형제회는 「사람들 사이에 사는 새로운 형태의 관상 수도회」로 인증받은 채 이슬람 국가인 중동 지역을 비롯 남미 아프리카 아시아를 포함한 40개국에 진출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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