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청에서 근무한 이상택 신부
“철갑 추기경에서 주님의 겸손한 종으로”
『위대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다음으로, 추기경님들은 주님 포도밭의 단순하고 미천한 일꾼인 저를 뽑으셨습니다』
교황으로 선출된 직후 성 베드로 광장에 모인 수만 명의 신자들에게 한 라칭거 추기경 아니 베네딕토 16세의 첫 일성이다.
「주님 포도밭의 단순하고 미천한 일꾼」 흔히 철갑 추기경으로 일컬어지던 요제프 라칭거라는 인물이 자신을 이렇게 묘사하리라고 기대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이 대중 매체의 시대에 라칭거 추기경은 그동안 말하자면 자신에 대한 이미지 메이킹에는 별로 성공을 하지 못한 것 같다. 라칭거라는 이름이 교회 안팎에 주어온 인상은 아무래도 단순함과 겸손함보다는 난공불락의 요새 같은 견고함과 완고함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인상은 그가 가톨릭교회의 진리와 신앙을 수호하기 위해 바친 지난 이십여 성상이 그에게 달아준 훈장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지난 이십여 년이 어디 어지간한 시대였던가? 온갖 형태의 사조와 이념들이 그 극단을 오가며 진리를 또 신앙을 흔들어댄 시대가 아니었던가? 마르크스주의에서 극단적 자유주의까지, 집합주의에서 극단적 개인주의까지, 무신론에서 공허한 신비주의까지, 불가지론에서 종교혼합주의까지, 어느 것 하나 만만한 게 있기나 했던가?
이 사조와 이념의 홍수를 빌미로 득세하기 시작한 상대주의의 전횡은 신앙과 진리에 또 얼마나 큰 위협이 되고 있는가 말이다. 이러한 시대적 이념적 격랑을 지혜와 용기로써 헤쳐 지나온 온 진리와 신앙의 수호자에게 철갑 이미지만큼 어울리는 것도 달리 없을 것이다.
전임교황 장례미사 강론 감동
우리는 지난 4월 11일 요한 바오로 2세의 장례 미사를 주례하면서 모든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킨 그의 강론을 기억한다. 요한 바오로 2세의 짧지 않은 위대한 생애를 어느 누가 그보다 더 정확하고 깊이 있게, 또 감동적으로 압축해서 묘사할 수 있었을까?
특히 요한 바오로 2세가 생전에 교황궁 창가에서 우리에게 내려주던 축복을 이제 하느님의 집 창가에서 내려주고 있을 것이라는 강론의 마무리는 진정 압권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또 일주일 뒤인 4월 18일 콘클라베 시작 미사를 주례하면서 그가 숙명처럼 행한 강론을 기억한다.
이 미사의 강론에서 그는 특별히 바오로 사도의 에페소서 4장14절의 다음 말씀을 상기 시킨다. 『이제 우리는 어린 아이가 아니라야 합니다. 사람들이 못된 의도로 속이는 온갖 가르침의 풍랑에 까불리거나 이리저리 밀려다닐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참되이 살며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향해 온전히 자라나야 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다음 교황을 뽑을 추기경들에게 그들이 그리스도의 양떼를 어린 아이의 그런 신앙이 아닌 어른의 성숙한 신앙으로 이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 더 이상 온갖 불온한 가르침의 풍랑에 이리저리 까불리는 어린 아이의 신앙을 극복하고 그리스도를 온전한 척도로 삼고 사랑과 진리 안에서 충실히 살아가는 참된 신앙인으로 거듭나야 함을 지적하는 분명한 입장 표명이 아닐 수 없다. 이리하여 남다른 지혜와 용기로 무장된 그의 철갑 이미지는 새삼 확인된 듯하다.
주님의 사람, 주님의 일꾼
하지만 나는 그가 스스로를 「주님 포도밭의 단순하고 미천한 일꾼」으로 묘사한 데 대해 전적으로 동의하고 싶다. 바티칸에서 근무하는 동안 나는 가끔 업무 협조를 청하는 라칭거 추기경의 친필 서명이 담긴 공문을 받아보곤 했다. 서명은 그 사람의 성격을 잘 드러내는 법이다. 공문 한 모퉁이에 수줍은 듯 아주 자그마하게 「요제프 라칭거」라고 씌어진 그의 서명을 보면서 나는 이분의 진면목이 밖으로 알려진 바와는 많이 다르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사무실을 오가는 길에 가끔 마주치면서 그분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그분은 겸손하고 부드러운 분이었고 무엇보다 주님의 사람, 주님의 일꾼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가 유럽의 평화와 일치를 위해 헌신한 교황 베네딕토 15세의 이름을 선택해 이어받은 사실에도 주목하고 싶다. 그분의 본래 모습은 바로 모든 이의 평화와 일치를 위해 충실하게 일하는 주님의 겸손한 종인 것이다.
일치와 평화위해 헌신하길
나는 이제 그분이 당신 본래의 모습과 원의대로 이 세상 모든 사람의 일치와 평화를 위해 당신의 교황직을 부드럽고 거룩하게 또 조용하게 수행하실 수 있기를 간절히 빈다. 틈틈이 그토록 좋아하는 모차르트의 피아노곡을 연주하시면서 말이다. 하지만 오늘의 교회와 시대가 과연 그분을 그렇게만 사시도록 가만히 내버려 두겠는가하는 의구심을 뿌리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주님, 당신의 단순하고 겸손한 종 베네딕토에게 풍성한 은총을 베풀어 주소서!』
<이상택 신부는 2001년~2004년 말까지 교황청 종교간 대화 평의회에서 아시아 담당관으로 근무했다. 지금은 대구가톨릭대 신학대 교수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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