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영성실현의 터전 만들어야”
베네딕토 16세 교황으로 즉위한 라칭거 추기경은 그의 저서 「그리스도 신앙 어제와 오늘」에서 오늘날 신앙인이 던져버린 인간본연의 진리문제를 고민하고 있다. 어쩌면 현대문화는 본질적으로 진리라 이름하는, 포기해서는 안되는 그 무엇을 상실하게 만드는 체계가 아닐까?
철학사의 관점에서 볼 때 현대 사회와 문화는 16세기 이래 유럽에서 이루어진 근대의 혁명, 계몽주의와 산업혁명에 의해 체계화되었다. 그것은 한마디로 자본주의와 과학?기술주의, 정치적 민주주의로 대변된다. 문제는 자본주의와 과학.기술주의가 그 이전 시대에서 지녔던 자연과 사물, 인간과 세계에 대한 사고체계를 근본적으로 변형시켰다는 데 있다. 중세에서는 창조하는 자연(ens creans)과 창조된 자연(ens creatum)이란 사유로 자연과 인간을 동일한 존재자의 자리에 위치시켰다. 그러나 근대는 이 모든 것을 나와 타자, 주체와 객체란 도식으로 정형화함으로써 자본주의와 과학.기술주의의 체계를 가능하게 한다. 그것은 주체로 설정된 나 이외 모든 것을 객체로 설정하는 철학이며, 이에 따라 자연과 사물, 세계와 인간조차 타자화되고 대상화되는 구조틀에 갖히게 된다. 이제 그 모두는 재화와 자본을 산출하는 대상이 되거나, 객체적 지식의 대상으로 환원된다. 마침내 가치와 판단, 행위의 규범은 객체화된 사물과 그와 관련된 주체라는 관계틀에 함몰되게 된다.
이 체계는 물화(reification)되거나 대상화될 수 없는 것조차 수량화하며, 그렇지 못한 것은 철저히 배제시켜버린다. 『아는 것이 힘』이라는 계몽주의의 모토는 이러한 대상을 지배하거나 소유하며, 장악하는 지식과 권력을 의미한다. 자연과 인간, 영적 세계를 관조(theoria)하는 지혜는 객체화된 지식(theory)이 된다. 인간은 끝없이 지식과 힘을 통해 모든 것을 소유하고 지배할 뿐 자신의 존재 의미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학문과 예술, 종교는 의미의 문제를 벗어나 객체화된 실재의 세계에만 관계하며, 인간의 본성은 그 의미와 영적 가치를 상실하게 된다. 이에 따라 초래된 현대 문화의 탈신성화, 탈영성화는 마침내 인간에게 「의미」 대신 사물에 대한 정보와 지식을, 그 이상의 세계 대신 실재의 형태로 존재하는 현실 세계가 전부인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근대는 문화 역시 그렇게 왜곡한다. 그래서 문화가 인간이 만든 문화 업적이든, 또는 제도와 관습, 법, 사회체제이든 오로지 대상화할 수 있는 어떤 것이 될 뿐이다. 현대의 자본주의와 과학기술주의는 무한한 진보라는 화려한 선언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소외와 왜곡, 경쟁과 투쟁, 모든 것을 자본화하고 산업화하며, 결국 의미상실과 영성의 결핍만을 초래하게 만든다.
이런 문화의 위기를 경고하면 할수록 더 많은 웃음을 안겨주는 어릿광대, 그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그럼에도 이미 우리가 체험한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 때문에 그것을 외쳐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지닌 시대의 몫일 것이다. 하느님 나라의 소식을 일상의 삶에서 구현하고 드러내는 것이 일상의 영성이기에, 우리는 문화를 영성이 실현되는 궁극의 터전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미 와 있지만, 아직 이루어지지 않는 하느님 나라, 그 역동성을 이룩해가는 인간의 노력과 하느님의 일하심을 선취하는 과정을 문화로 이해할 때 우리는 문화를 영성의 자리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그것은 문화를 실체가 아니라 인간의 자기실현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문화를 영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삶을 성취하는 과정 그 자체를 문화로 이해할 때, 우리는 근대의 객체화하는 문화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신승환 <가톨릭대학/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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