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기쁨”
<본문 >
절대적 충만 그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피조물들로 하여금 존재하게 하셨다면, 그것은 전혀 필연(必然)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 피조물들로 하여금 당신과의 「유사함」에 참여하는 행복을 누리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당신 피조물이 무한하신 당신에게서 무한하게 길어 마실 때, 당신 자신도 피조물의 즐거움으로 즐거우시기 위함이었다. - 「사랑의 단장」 3, 46
<해설>
인간의 존재 자체가 하느님의 사랑
“사는 것이 아무리 힘겨워도 하느님만 계시면 충분하고 죽음 역시 아름답지 않겠나”
짧지만 심오한 이 단상(短想)의 출전은 비잔틴의 위대한 신학자요 수도승이었던 고백자 막시무스(580~662년) 의 「사랑의 단장」이다. 이 작품은 100개의 짧은 사색 묶음을 한 권으로 하여 모두 네 권으로(그러니까 모두 400개의 단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위의 구절은 3권 제 46단장을 모두 옮긴 것이다.
하느님께서 무슨 필요가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우리를 창조하신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하느님은 본성상 절대적으로 충만하지 못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창조가 우발적으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다. 이 경우 사람은 하느님께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가 될 것이고, 그렇다면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란 말도 할 수 없게 되고 말 것이다.
막시무스는 성서와 전통에 따라 피조물의 존재는 무엇보다 하느님 사랑의 부르심으로 생긴 것이라 본다. 우리에게 주어진 최초의, 그리고 지고(至高)의 부르심은 바로 우리의 존재이다.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우리를 부르셨다는 표지가 된다는 말이다.
예컨대 저물녘 혼자 들길을 걷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일락서산(日落西山)에 한숨이 절로 새나올 만큼 기가 막힌 노을이 걸려 있었다고 치자. 이 아름다운 장면을 누군가와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겠는가? 맛있는 음식도 혼자 먹노라면, 좋은 사람과 같이 먹었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던가? 이처럼, 절대적 충만이신 하느님께서도 이 충만함을 누군가와 함께 나누었으면 하는 생각을 품으셨다고 생각해 볼 수 있으리란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을 창조하시고서는, 마침내 존재의 충만함을 함께 즐길 수 있게 되어 그분의 기쁨도 더 충만해 졌으리라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과연 하느님이 본성상 사랑이시라면 마땅히 그러시지 않으셨겠는가? 사랑은 기쁨을 공유할 타인의 현존을, 그 「얼굴」을 원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대체로 이런 것이 막시무스의 생각이었다.
더 구체적으로, 그는 하느님께서 창조를 통하여 당신 피조물이 당신과 「닮은 상태」(similitudo)에 참여하는 행복을 누리게 하고 싶으셨다고 말한다. 사실 막시무스는 자기 이전까지 교부 전통으로 면면히 이어오던 이른바 「신화」(神化theosis, deificatio)의 가르침을 종합하여 후대에 (특히 아토스 산의 그레고리우스 팔라마스에게) 전수한 분이다. 이 「신화」의 맥락에서는, 사람의 구원이란 단순히 지옥 죄벌을 면하고 천당에 가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사람이 거룩하게 변모하여 신성(神性)의 영역으로까지 진입하게 되는 것을 뜻한다. 그리하여 어떤 의미로 「하느님이 되기」에 이르기까지 하느님과 하나를 이루는 것을 뜻한다.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해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할 때에(2베드 1, 4 참조) 비로소 자기 창조의 목적을 실현하기에, 바로 이때에 가장 큰 기쁨을 누리게 된다. 그리고 이 기쁨은 세상의 다른 모든 기쁨들과는 달리 끝이 없다.
사람의 이 기쁨을 일러 막시무스는 『피조물이 무한하신 분에게서 무한히 길어 마신다』고 표현한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모든 피조물은 사람이 「사용」할(uti) 대상인 반면, 하느님만이 오직 「즐길」(frui) 대상이라고 가르쳐 온 교회의 오랜 신학 전통을 이해하게 된다. 사실 참된 기쁨은 하느님 외에는 없다. 피조물을 즐기고 하느님을 사용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우상숭배의 전형이 될 따름이다.
그런데 여기서 참으로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이렇듯 당신의 본성(신성)에 참여하게 되는 것을 시기하시거나 꺼리시는 분이 전혀 아니시라는 점이다(필립 2, 6~11 참조). 그래서 막시무스는 하느님 『자신도 피조물의 즐거움으로 즐거워하시기 위해』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노래하고 있다.
아, 이런 하느님을 자기 하느님으로 모신 이에게 사는 일은 참으로 아름답지 않겠는가. 죽는 일 역시 이에 못지않게 아름답지 않겠는가.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이렇듯 우리 기쁨을 당신 기쁨으로 삼으시는 하느님이시라면, 이렇듯 아름다운 분이시라면 말이다.
그렇다면 어떤 성인께서 말씀하셨듯이, 사는 일이 아무리 힘겨워도 『하느님만 계시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우리 역시 고백할 수 있지 않겠는가.
오늘날 우리 교회가 놀랄 만한 성장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쉬는 교우」의 수가 점점 많아지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다. 그 중 중요한 것이 많은 신앙인들에게, 특히 젊은이들에게, 신앙생활이 순전히 의무로 느껴지고 있다는 점이 아닌가 한다. 주일 첨례가 힘이 아니라 짐으로, 성사 생활이 구속(救贖)이 아니라 구속(拘束)으로 체험되는 경우가 많다. 신앙생활이 해방이 아니라 채무(債務)로 여겨지는 때가 많다. 하느님에 대한 왜곡된 생각(神觀)이 우리 무의식을 지배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 그 원인 중 하나일 수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 신앙은 결코 「기쁜 소식」으로 체험될 수 없거니와, 고백자 막시무스의 이 「사랑 노래」가 밝히는 하느님의 진면목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 참으로 크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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