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모토나리는 박해, 아들 히데카네는 신자
막강한 장군의 권력체제하에서 전국적 기리시탄 금제가 발령되자 각 지방의 영주들은 각각의 민감한 반응과 동시에 여러 가지 태도를 보였다.
기리시탄 전성기에는 무역의 이익관계에서 이든지, 아니면 새로운 학문과 문화 사상 과학 기술 등의 새로운 서양문물의 매력에서든지, 또는 순수한 종교적 신비의 은총에 의해서든지, 동기유발이 무엇이든 간에 기리시탄이 된 영주가 많았다. 오무라 스미타다(大村純忠), 오오토모 소린(大友宗麟),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다카야마 우콘(高山友近)과 같은 훌륭한 기리시탄 영주가 있는가 하면 난간에 부딪치면 기리시탄이 걸림돌이 되어 이름 없이 사라지는 영주, 배교와 회심을 거듭하는 영주, 아니면 막부와 중신들의 압력에서 또는 권력과 세상의 이익을 위하여 신앙을 버리고 박해자로 변신하는 영주도 있었다.
기리시탄은 아니더라도 호의적인 영주도 있었다. 일본 최초의 포교허가장을 준 백제왕의 후손인 야마구치의 영주 오오우치 요시타가(大內義隆)와 그의 양자 요시나가(義長), 26인 순교 때 최소한의 처형인원 명단을 작성하여 장군에게 제출한 고니시 유키나가의 맹우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 추방당한 영주들을 당당히 받아드린 가네자와(金澤)의 마에다 도시이에(前田利家)와 도시나가(利長), 금령 하에서도 선교사들의 유일한 피난처가 되게 했던 히로시마의 영주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 등은 기리시탄에 대하여 매우 호의적이었다.
반대로 영주와의 감정대립, 종교사상이나 영토싸움 등으로 처음부터 기리시탄에 대하여 증오감을 가진 영주도 있었다.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그의 아들 다다히로(忠廣)는 불교 신자로 고니시 유키나가와는 숙적 관계였다. 유키나가가 참수 당하자 그의 영지를 몰수하고 박해를 시작하였다. 유키나가의 기리시탄 무사들과 서민들이 비위에 거슬렸던 것이다. 주된 14명의 무사들과 그 가족들을 처형하였다. 그들의 유체는 구마모토의 네거리에 걸려 주민들에게 기리시탄 경고로 사용되었다.
야마쿠치에서는 오오우치 요시타카의 호의적인 그리스도교 정책에 대하여 가신들이 반란을 일으켜 오오우치가(大內家)를 몰락시켰다. 야마구치 영주가 된 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와 데루모토(輝元)는 기리시탄의 대표적인 적이었다. 그러나 박해자 모토나리의 9번째 아들 히데카네(秀包)는 기리시탄이 되어 오오토모 소린의 딸과 결혼했고 신앙을 지키다 선종했다. 부인의 묘는 기리시탄이라는 이유로 모리가(毛利家)의 묘역에서 쫓겨나 산중에 묻혔다.
히젠의 영주 류죠지 다카노부(龍造寺隆信)는 이름난 불교 신자로 인접한 오무라와 오오토모, 아리마를 시시각각으로 침범하여 선교사들에게는 「악몽과 같은 존재」였다. 그의 영토에는 기리시탄이 없었으며 그는 결국 전장에서 전사했다.
천황은 신들의 중심으로 자리를 굳혔고, 당시 제1 실력자 이에야스 장군은 신들 중에 하나로 위치 잡으려하였다. 따라서 일본 절대 권력가들은 유일신 기리시탄을 적대하는 중심 세력이 되었다. 여기에 영합한 불승과 불교는 어용종교로 전락하였다.
박양자 수녀 (한국순교복자수녀회.오륜대 한국순교자기념관 학예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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