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일생동안 가장 관심을 쏟는 부분은 무엇일까? 각 세대마다, 그리고 각자가 처한 환경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겠지만, 그래도 가장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관심은 「주체적 삶에 대한 구현」이 아닐까 한다. 여성, 남성이라는 생물학적 구별을 넘어서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삶이, 타인이나 외부적 제도에 의해 억압되는 상황을 가장 두려워한다. 삶의 주체에 대한 질서가 붕괴되기 때문이다.
이제 곧 25주년을 맞이하는 5,18사건 역시, 인간 본연의 주체성 상실에 대한, 가장 처절하고 비극적 저항이었음을 우리는 기억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에스델서는 자신의 목소리를 전적으로 박탈당한 피지배인 으로서의 여성과 식민지 여성이 감수할 수밖에 없었던 절박하고 불평등한 삶을 전달해주고 있다.
특별히 오늘 살펴보게 될 에스델 1장의 사건(와스디 왕비의 폐위)은 남성위주의 고대 관료사회가 저지르는 병폐와 어리석음을 우리에게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자신의 존재가 진열장의 인형처럼 박제되는 것, 남편의 능력을 과시하기위한 일종의 상품으로 전락하는 것, 입이 있어도 슬프고 아프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 모든 아내와 여성들이 경험해보았을 가장 두려운 현실이요 비극은 아닐까.
구성에 대한 문제
지난번에도 언급한 바 있지만, 에스델서는 제1경전(히브리어 부분)과 제2경전(희랍어 부분)이 합성되어 있어서 본문접근에 어려움을 준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진행하고 있는 고찰은 「히브리어 성서」의 「성문서」 연구이기에 여기서는 희랍어 부분에 대한 접근은 생략하고자 한다. 에스델서의 히브리어 부분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1장~2장: 에스델이 왕비가 되기까지→ 3장~9, 19: 하만의 음모와 운명의 극복→9, 20~9, 32: 부림절 →10, 1~3: 맺음말.
1장. 왕비 와스디의 폐위
1절은 이 이야기가 아하스에로스(페르시아의 왕이었던 크세르크세스 1세(기원전 485~465년)는 에스델서와 에즈 4, 6에서 「아하스에로스」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시대의 사건이었음을 제시한다.
에스델서에 의하면 그는 재위 3년, 「수사」라는 도시의 궁궐에서 모든 장군들과 귀족들을 위한 잔치를 무려 180일 동안 베푼다.
이는 자신의 영화와 경제력, 권세를 과시하기 위한 일종의 정치적 제스처였다(3~4절). 이렇게 귀족들만의 축제가 끝나자 수사성에 사는 모든 백성을 위한 잔치가 7일간 이어지는데(5~8절), 이때 왕비 와스디는 여자들만을 위한 잔치를 주관한다(9절). 입문부분에서 설명한 바 있지만, 와스디라는 이름의 왕비는 페르시아의 실록 그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더욱이 역사학자 헤로도투스는 크세르크세스 왕의 아내를 아메스트리스라고 호칭하고 있기에, 와스디라는 인물의 역사성은 거의 부정되고 있다. 어쨌든 에스델서가 제시하는 「사건」은 그 화려했던 잔치 마지막 날 발생한다.
『술로 기분이 좋아진』(10절) 왕은 왕비의 미모를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어서, 그녀를 단장시켜 잔치에 참석한 모든 이들에게 보여주고자 한다. 그러나 자신의 동의 없이 내려진 꽃단장(?) 명령에 마음이 상한 왕비는 왕의 명령에 불복한다. 이에 격분한 왕은 그 잔치에 모여 있던 당대 최고의 법률가들에게 그녀를 어떻게 처벌할지를 의논한다.
13~22절은 당시 고대 사회의 현실이 여성에게 얼마나 부조리한 것이었는지를 여실히 제시하는데, 윤리적이거나 도덕적인 죄를 짓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와스디의 행위는 왕에 대한 모욕일 뿐 아니라 모든 백성들을 무시한 행위로 치부되기 때문이다(16절).
설상가상으로 이 사건이 페르시아의 여인들에게 퍼져 남편들의 위상이 손상될 것을 우려한 남성 귀족들은(17절) 왕비 와스디를 폐위시키는 것으로 사건을 종결짓는다. 여성들의 도전을 사전에 차단하는 극적인 처방을 쓴 셈이었다.
모욕과 상처가 되는 말
여성의 입장에서는 상처가 될 수밖에 없는 폭력들이 있다. 인형도 아니고, 장식물도 아니건만 아무 때나 남성들에게 소유물이나 상품취급을 받을 때이다. 치장을 하고 사람들 앞에 나오라는, 도무지 분별력 없는 남편의 명령이 와스디에게 얼마나 치명적 사건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성서 본문은 그 명령이 갈등의 시발이었음을 명시한다.
남성들이 여성과의 성별적 차이를 상하 계급성의 도식으로 이해하려드는 한, 그리고 자신들의 어머니 역시 여성이었음을 반복적으로 망각하는 한, 진정한 남녀관계의 재구성은 묘연한 관념이자 허구적 환상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관계」라는 까다로운 시스템은 상대방의 주체적 삶에 대한 예의 있고 진심어린 존중을 통해서만 다가설 수 있는, 일종의 초월이자 희생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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