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발가락 다 잘리고 이마에 낙인도 찍혀
구치노쯔의 조선인 순교자
아리마(有馬)의 구치노쯔(口ノ津)는 1562년부터 기리시탄 항구도시였다. 동방순찰사 발리냐노가 1579년 제1차 전국 선교사 회의를 이곳에서 개최하였으며 박해 중에는 예수회 전도소를 여기에 두었다.
1614년 11월 22일, 박해자 하세가와 자효에(長谷川左兵衛)는 교회를 파괴한 자리(현 옥봉사)에 기리시탄들을 불러들였다. 동네 회장 토마스 등 70인이 모였다. 이 중에 조선인 미겔과 베드로가 있었다.
『배교하라』, 『못합니다』
곤봉으로 때리고 발로 차고 옷을 벗겨 얼굴을 땅에 처박아 흙투성이로 만들었다. 손발을 뒤로 묶고 휘어진 등에 무거운 돌을 얹어 여러 번 빙빙 돌리는 소위 학춤이라는 고문을 하였다. 손 발가락을 전부 자르고 벌겋게 달군 인두로 이마에 십자가 낙인을 찍었다. 기도를 시작하자 돌로 입을 때려 이가 부서졌다(조선인 베드로). 계단 위에서 밀었기 때문에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조선인 미겔). 거기서 무릎의 힘줄을 끊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형리는 그의 머리를 베고 몸을 토막토막내었다. 이날 18명이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다.
미겔 코라이. 48세. 1594년 포로. 나가사키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는 고문을 받을 때 『나는 조선인 미겔이다. 하느님을 위하여 이 고문을 받는다. 이교의 나라로부터 여기에 데려온 하느님께 감사합니다』하였다.
그는 빈곤하였지만 금?토요일은 항상 단식을 하고 모은 것은 가난한 자에게 희사했다. 그리고 나환자를 집에 데리고 와서 돌보아주고 있었다. 순교에 대한 열망이 비상하게 컸다. 어느 날 포졸들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모든 사람에게 『이들은 우리들의 행복을 위하여 하느님께서 보내신 것이다. 병졸들을 두려워말고 깊은 애정을 가지고 기쁘게 맞이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미겔 코라이가 체포되기 전에 뿌린 소량의 밀 씨앗 기적 이야기가 있다. 순교자의 피에 의해서 복음의 씨앗이 점점 자라나 얼마든지 베어가도 또 새로운 이삭이 나와 백배 천배로 불어난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베드로 코라이. 38세. 조선 태생. 구치노쯔에서 세례. 고문 후, 칼로 여기 저기 찌르며 『배교하라』고 하였지만 『그런 일은 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자 참수되었다.
13세 때부터 30세까지 노비로 살았지만 항상 모범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다. 기리시탄의 가장 명단을 작성할 때, 베드로는 가난하여 집이 없었기 때문에 명단에서 빠졌다. 그는 그것을 매우 슬프게 생각하여 『이렇게 원했던 행복을 빼앗지 말아줘』라고 열심히 부탁하였다. 동네 회장은 그의 집주인 대신에 베드로 코라이를 기재하였다. 그러자 베드로는 『행복이 오는 것은 확실하다. 지금까지 오랫동안 이 희망으로 다른 모든 것을 버리고, 일주일에 3회 단식과 2번 편태의 고행을 하고 있었다』라고 하였다. 순교 전날 밤 친구와 기도를 한 다음 『성모님이 나를 방문하여 용기를 주셨다. 그래서 순교자가 되는 것은 확실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과연 다음날 기뻐하면서 원하던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다. 하느님께서는 그의 눈물을 말끔히 닦아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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